얼마 전 위장병을 앓으면서 ‘맛있는 세상, 먹는 것만은 욕망하고 살리라’는 나의 소신이 한 풀 꺾였다. 돌이라도 소화시킬 줄 알았던 내 위(胃)가 힘들다고, 더 이상 못 버티겠다고 시위를 하고 나선 것이다. 지인 중에 위암 수술 받은 분이 수술 후 관리하는 모습을 보면서 “하느님은 병도 성격 봐서 주시는구나”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그게 아닌 것 같았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위(胃)는 가려서 먹어줄 것을 요구하는 것을 처음으로 느꼈다.
오래전 읽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가 생각났다. 환갑이 넘은 조르바씨가 나를 졸졸 따라다니며, “두목, 음식을 먹고 그 음식으로 무엇을 하는지 대답해 보시오. 두목 안에서 그 음식이 무엇으로 변하는지 설명해 보시오. 그러면 나는 당신이 어떤 인간인지 말해 드리리다”고 다그치는 것 같았다. 19세기 독일의 휴머니즘 철학자 루트비히 포이어바흐(Ludwig Feuerbach, 1804-1872)가 말한 “우리는 우리가 먹는 대로 만들어지는 존재”라는 말도 생각났다. “모든 생명을 희생시켜 그것을 먹어야 내 생명이 유지되는 운명 속에서, 나는 과연 나를 위해 죽어준 그 생명들을 위해 무엇을 하고 살아가는가, 그 생명의 대가를 제대로 치르며 살고 있는가”라는 생각에 위장이 더 아파왔다. “먹고사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인간이 먹는 음식은 그의 육체뿐 아니라, 의식과 사고에도 많은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단단한 음식에서부터 마시는 물과 호흡하는 공기에 이르기까지 외부에서 오는 모든 것에 의해 만들어지는 존재이기 때문이란다. 환경이 중요한 이유기도 하다. 또 인간은 무엇을 먹느냐에 따라 상대방을 인식하기도 한다고 했다. 피코 델라 미란돌라나, 레오나르도 다빈치 같은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은 인간의 몸에 흡수된 음식물의 양과 질에 따라 인간의 육체와 정신, 정서, 영적인 부분이 달라진다고 주장했다.
특히 다빈치는 처음으로 ‘섭생(攝生) 인문학’을 이야기한 바 있다. 그의 해부학 관련 수기 노트에는 “몸에서 섭취하는 영양소와 그것을 소모하는 영양소가 균형을 이루지 못하면 건강을 잃게 된다. 몸에 영양소를 공급하지 못하면 생명은 파괴되고, 공급된 영양소를 매일 전부 소모하게 되면, 소모한 만큼 생명은 재생된다”고 적고 있다. 그뿐 아니다. 요리사이기도 했던 다빈치가 요리에 대한 생각을 적어둔 노트 ‘코덱스 로마노프’(Codex Romanoff)에는 어떤 음식물이 인체에 좋은 영향을 미치고 어떤 것이 나쁜 영향을 미치는지를 분류하여 식품에 따라 나름의 평가를 했고, 몇 가지 요리 종류와 그의 요리관과 당시 음식 문화에 대한 기록까지 담았다. 요리관이 뚜렷한 요리사의 음식이 맛과는 무관했던지, 다빈치 요리의 맛에 대한 품평은 눈에 띄지 않으나, 주방의 조건으로 청결과 쾌적한 주방 분위기를 이야기하면서 “주방에 음악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 것은 역시 ‘인문주의자’다운 발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요리는 단순히 먹는 행위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그것을 준비하는 과정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다빈치의 섭생 인문주의는 그의 해부학적 연구의 결산이라고 할 수 있다. 소화기계통 연구 수기 노트에는 어떤 음식물이 얼마만큼 어느 기관에 머무는지, 각종 식재료에 대한 분석과 음식을 준비하는 환경과 사람의 정서까지 상세히 적혀 있다. ‘먹방’이 판을 치고 맛집이 홍수를 이루는 우리의 현실에서 그가 우리에게 조언하는 것은 다음의 세 가지다. “음식을 섭취했을 때 얻는 에너지의 양과 그것을 소비하는 에너지의 양을 같게 하라!”, “반드시 배가 고플 때 음식을 섭취하라!”, “식탐을 주의하라!” 모두 지키기 정말 힘든 것들이다!
김혜경(세레나·대구가톨릭대학교 인성교육원 강의전담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