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다른 선진국에 비해 가장 빠르게 고령화 사회에 진입했다. 여기다 2016년 통계청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노인빈곤층은 전체 노인의 20%에 육박하고 OECD 1위라고 한다. 그리고 독거노인의 수도 갈수록 증가하는 실정이란다. 어느 순간부터 노인 고독사가 크나큰 사회문제로 부각되고 있다. 이처럼 우리 사회는 가족, 이웃과 사회의 관심에서 벗어나 쓸쓸히 살아가거나 온갖 차별과 소외를 겪으며 어렵고 힘들게 살아가는 사회적 약자들이 무수히 많다. 그 어느 때보다 우리 교회가 이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를 아끼지 말아야 할 요즘이다.
예수님 당시에도 온갖 부류의 사회적 약자들이 많았다고 한다. 대부분 그들은 누군가의 도움 없이 혼자 살아가기엔 너무도 벅차고 힘든 불쌍한 민초(民草)들이다. 때론 삶의 무게가 너무도 버거워 목놓아 울고 파도 울지 못한 채 그저 속울음을 토해 내며 지내야 했으니, 이 얼마나 가련한 신세인가. 과연 이 지긋지긋한 가난과 질병에서 벗어나 암울한 상황에서 역전될 그날은 언제일까. 예수님께서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는’(루카9,58) 가난한 모습으로 오시어 ‘가엾은 마음’(루카7,13)으로 바라보시고, 손을 잡아주시며(마르5,41), 목을 껴안으시는(루카15,20) 참된 부성(父性)을 보여주셨다. 하늘보다 높으시고 충만한 분께서 자신을 낮추시고 비우신 것이다. 이 땅의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향한 참된 연대와 일치의 표현이자, 사랑과 자비의 극치를 보여주신 것이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사회적 약자들을 억압해온 부조리한 상황들과 악의 세력엔 매우 단호하셨다. 또한 이를 애써 모른 척하면서 하느님의 구원을 바라는 소위 민족지도자들을 ‘회칠한 무덤’(마태23,27)과 같다면 꾸짖으셨다. 이로써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고 부정과 불의를 조장하는 악행을 막아 하느님의 정의(正義)를 바로 세우고자 하셨다. 이는 기성 제도권의 반발을 불러와 수난과 죽음의 단초가 된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죄와 죽음을 뚫고 영광스러이 부활하신 것이다. 그 순간 온갖 죄와 죽음은 패배하고(사목헌장 29항) 사랑과 정의가 깃든 새로운 세상(2코린 5,1-2 참조)이 열린 것이다. 그분의 삶이야말로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생명의 감로수이자, 오늘날 교회가 지금 여기에서 반드시 구현해야 할 시대적 소명이 분명하다.
이에 따라 교종 프란치스코께서는 청빈한 모습으로 사회적 약자들을 삶의 중심에 놓고 사목적 관심과 배려를 아끼지 않는다. 세계교회는 물론 한국교회에서 크나큰 반향(反響)을 불러왔다. 그 어느 때보다 사회교리에 대한 관심과 비중이 드높고 각 교구 및 본당별로 활기차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 주교님은 고공농성중인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직접 만나기도 하고, 어떤 교구에서는 사회정의와 인권존중, 빈곤퇴치를 위해 미사를 봉헌하기도 한다. 심지어 꽃동네를 비롯한 사회복지시설들을 찾아 애덕을 실천하기도 한다. 물론 어느 순간 교회 내에 음산하게 스며든 세속화(化)의 그늘을 걷어내고, 교회의 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한 그 과정에서 파열음도 적잖다. 아직도 이곳저곳에서 교회의 문턱이 너무 높고 사회적 약자들과의 연대와 협력을 체감하지 못한다고 한다. 교회다운 교회로 거듭나기 위한 거룩한 진통(陣痛)을 겪고 있다. 이럴수록 그동안 사회적 약자들의 아픈 상처를 반추(反芻)해 보고 무관심과 무지로 일관해 온 사실을 고백하며 예수님의 그 길을 묵묵히 걸어가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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