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8월 15일 수립된 우리 정부는 1950년 북한의 남침으로 발발한 6·25 전쟁과 1953년 7월 27일 체결한 정전협정 과정에서 100만 명 넘는 북한주민들을 수용했다. 이들은 38선을 따라 내려왔다고 해서 ‘38 따라지’, 고향을 잃었다는 의미에서 ‘실향민’으로 불렸다. 해방과 전쟁이라는 극심한 혼란 속에서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에서 보듯 북쪽에서 남쪽으로 넘어온 ‘월남자’들은 국가의 정착지원을 기대할 수 없었고 사회적 차별을 견뎌야 했다.
하지만 월남민은 전쟁의 상흔으로 폐허가 된 대한민국의 재건과 산업화에 앞장섰다. 1948년 5월 31일 처음으로 문을 연 제헌국회에 12명이 진출했고 38도선 이북의 북한 주민 몫으로 의석 100석을 배려했다.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산업화의 초석을 닦은 월남민으로 현대의 정주영, 신동아의 최순영, 태평양의 서성환 등이 있다. 1998년 정주영 회장의 ‘1001마리 소떼 방북’은 미래학자 기소르망이 ‘20세기 최고의 분단국 전위예술’이라고 표현할 만큼 놀라운 사건이었다.
월남민은 냉전시대와 체제경쟁이 시작된 1960년대부터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가 붕괴하는 1990년대 초반까지 ‘국가유공자 및 월남귀순자 특별원호법’과 ‘월남귀순용사 특별보상법’에 따라 북한의 정치체제에 항거해 남한으로 귀순했다는 의미로 ‘귀순자’, ‘월남귀순용사’로 명명된다. ‘귀순자’는 자본주의 체제의 우위를 인정한 데에 따른 보상원칙에 따라 새로운 체제에 대한 불이익 극복을 위한 지원금이 제공됐다. 그들이 보유한 정보능력을 고려해 보훈적 차원에서 정착금이 차등 지급됐다.
귀순자는 1991년 9월 18일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과 같은 해 12월 13일 ‘남북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에 근거해 새롭게 ‘탈북자’로 불린다.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 관계를 반영한 ‘탈북자’는 1990년대 중반, 북한의 ‘고난의 행군’ 시기를 거치며 보편적으로 사용된다.
‘북한이탈주민의 보호 및 정착지원에 관한 법률’이 1997년 1월 13일 제정되면서 ‘북한이탈주민’을 공식용어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통일부는 2005년, ‘탈북자’ 인식개선의 일환으로 공모과정을 통해 ‘새터민’이라는 용어를 제시했지만 탈북단체들의 반발에 부딪혀 2008년 11월 이후로는 ‘북한이탈주민’만을 공식 사용하고 있다. 북한이탈주민은 2016년 3월 현재 2만9137명에 달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의 시 ‘꽃’의 한 구절이다. 그동안 북한이탈주민은 우리 정부의 입장과 인식에 따라 다양한 이름의 꽃이 됐다. 이제 그 꽃은 내 이웃, 내 친구 그리고 내 가족으로 불리기를 소망한다. 마음의 눈으로, 집단이 아닌 한 사람의 꽃으로 피어나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박현우(안셀모) 통일의 별(Uni Star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