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하고 집으로 가는 지하철을 기다리던 중이었습니다. 집으로 가는 방향이 같은 동료와 함께 그날 있었던 일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저희를 불렀습니다. 뒤를 돌아보니 고운 정장을 차려입고 두 손 가득 종이가방을 들고 노신사가 서 있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내가 청량리 근처에 사는 딸네 집에 가려고 하는데 어떻게 가야 하는지를 모르겠소. 서울이 워낙 복잡해서 말이지” 하면서 길을 물으셨습니다. 마침 같은 지하철 방향이라 “할아버지, 저희랑 같이 가시면 될 것 같아요. 저희가 길 안내해 드릴게요”라고 얘기했습니다. “나 때문에 괜한 고생 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 늙은이가 나이도 많은데 느릿느릿하기까지 해가지고” 미안해하며 우리와 함께 지하철에 타신 할아버지.
가만히 계시다 갑자기 주머니에서 만 원짜리 지폐를 꺼내 주십니다. “이걸로 집에 갈 때 간식이라도 좀 사 먹어. 내 딸 같아서 그래. 너무 고마워서.” 괜찮다는 우리에게 끝까지 돈을 주시더니 가방에서 약과까지 꺼내 건네주시는 할아버지. 갑자기 너무 많은 선물을 받아 미안해진 저와 제 동료는 고마운 마음을 어떻게든 표현하고자 할아버지와 지하철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할아버지의 사연은 이랬습니다. 어릴 때 이북에서 사시다가 6.25 전쟁이 터지고 나서 힘겹게 남한으로 내려와 정착해서 사시는데, 떨어져 사는 여동생과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을 꾹꾹 여미며 살아가다 보니 할아버지의 삶은 어두운 잿빛 하늘과도 같았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세월은 흘러 가정을 꾸려 아버지, 그리고 할아버지가 되었고, 오늘 드디어 그 딸이 낳은 손녀를 보러 간다는 것이었습니다. 고단한 세월을 지나 기쁨의 빛이 비치는 날이었기에 할아버지는 길만 가르쳐 준 저희에게 간식도 주시고 용돈도 주셨던 것이겠지요?
청량리역이 다 와 갈수록 설렘을 감추지 못하시는 할아버지. “다들 너무 고맙네. 나 데려다준다고 고생 많았어. 나처럼 오늘 기쁜 하루 보내길 바라네.” 환히 웃으시며 역에서 내리시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제 마음도 어느새 따뜻한 기쁨과 뭉클함이 전해져 왔습니다.
정 쿠네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