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복음 21장 19절에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기 직전에 제자들과 한자리에서 식사를 마치시고 시몬 베드로에게 당신의 교회를 맡겨도 될 자격을 갖추고 있는지 확인하시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며 세 번씩이나 베드로 사도에게 사랑의 결정체를 확인하십니다. 베드로 사도는 매번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을 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내 양들을 돌보아라” 하십니다. 왜 세 번씩이나 베드로 사도에게 똑같은 질문을 하고 계실까 곰곰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질문의 의미는 베드로 사도가 세 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배척했던 베드로의 마음을 원상 복귀시키는 작업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이 교회 안에서 삼위일체와의 끊임없는 관계에서 성장되어지는 과정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교회의 반석이 될 당신의 수제자에게 사랑의 확인 작업을 하신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 사도에게 어떤 삶을 통해서 죽어서(순교)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실지를 말씀하시고 “나를 따라라”고 천명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을 따라가는 길을 베드로 사도에게 명령하시는 것은 전체교회에 말씀하신 것이고, 또한 교회 안에 당신의 모든 자녀들에게 명령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나를 따라라” 하신 이 말씀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가? 아마 이런 뜻을 담고 있지 않을까요? “나를 알아라. 나를 믿어라. 나를 사랑하여라. 나를 닮아라. 나를 본받아라. 나를 전하여라. 나를 행하여라. 나를 지켜라. 나의 모든 것이 되어라.” 등 이러한 제시어가 주어집니다.
우리는 주님의 삶을 우리의 삶 안으로 끌어들여, 하느님이신 그분이 인간의 삶을 사셨듯이 우리는 인간의 본성으로써 그분의 삶을 선택해서 살아가는 삶의 결정체를 이루어 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따라야 할까요? “미움에서 사랑을, 인성에서 신성을, 외적인 삶에서 내적인 그분의 모상을, 생각에서 행동으로 옮기는 삶을, 육신의 삶에서 영혼의 지침을, 불신에서 믿음의 견고성을, 교만의 자아도취에서 겸손의 낮은 자의 자리로, 게으름의 주저앉음에서 부지런함의 발돋움을, 육신의 외침에서 영혼의 외침을, 육신의 부산함에서 영혼의 고요함을, 잘못된 하자에서 올바름의 바로 잡음을, 욕심의 올가미에서 비움의 해방을, 욕망의 함정에서 자유로움의 출구를, 이기심에서 배려함의 기쁨을, 소유욕에서 자선의 희열을, 머뭇거림에서 과감성을, 손익계산에서 비움을, 오류에서 진리가 살아 있음을 따르라”는 주님의 뜻이 아닐까 합니다.
자, 이제 자신을 한번 찾아봅시다. 지금까지는 주님께서 하신 말씀의 의미를 몰라서 삶을 허송세월 보냈다면 이제는 “따라라”고 하신 의미를 제시 받았습니다. 어떤 실천을 할 수 있을지, 또 어떤 것은 실천할 수 없는지…, 실천할 수 없다면 왜 실천할 수 없는지를 자신에게 물어야 할 것입니다.
머리로만 주님의 명을 따라가는 척 하지 말고, 행동으로 아픔과 고통이 수반되는 그런 차원이 있는 따름이 되어지길 바라며 베드로 사도에게 명하신 “나를 따라라” 하신 주님의 말씀을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생각으로 받아들이는 신앙인이 되지 않기를 바라며, “나를 따라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신앙인이 되길 바랍니다.
김 미카엘(인천 남동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