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제주도는 자연의 보고(寶庫)이자 가장 살기 좋은 곳으로 알려지면서, 국내외 관광객이 몰리고 매년 만 명이 넘는 이들이 이주해 오고 있다. 제주가 하루가 다르게 바뀌고 있다. 반 세기 전만 해도 제주도는 절해고도(孤島)와 다름없었다고 한다. 바람과 돌이 많아 땅이 척박해서 주민 대부분은 먹고 살기가 힘들고 무속신앙에 의지해 살았다. 여기다 옛날부터 외세침입이 잦고 조선말에는 크고 작은 민란마저 끊이지 않아 유배의 섬이 되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제주 4·3의 고초를 겪으면서 고립감과 상대적 박탈감은 깊어지고, 고통과 상처 등의 생채기를 덤으로 안고 살아왔다.
이런 동토(凍土)에 주님께서는 고난의 장막을 걷어내고 복음화의 씨앗이 뿌려지길 바라셨다.
2016년 교세통계표를 보니, 우리 제주교구의 신자수(數)는 7만5000천 명이고 인구대비로 12%로 나타났다. 매년 꾸준히 신자수가 증가하고, 제주지역에서 천주교에 대한 인식과 호응이 매우 좋아 고무적이다. 제주도의 역사와 문화, 지리적 환경 등을 고려해 볼 때 하느님의 섭리가 아닐 수 없다. 또한 온갖 시련과 박해 속에서도 꿋꿋이 신앙을 지켜낸 선조들, 지역사회의 아픔을 함께 나누며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를 아끼지 않은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들의 소중한 기도와 희생의 결실이 아닐까 싶다. 이 중에 매우 특별한 분이 있는데 바로 고(故) 최정숙님이다. 오로지 ‘하느님 빽’에 의탁하여 자신을 다 바쳐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오늘날 제주교구의 복음화를 이끈 신앙인의 귀감이다.
최정숙님은 1902년 제주시에서 출생해서 열두 살에 프랑스 출신 구마실 신부님에게 세례를 받았다. 젊어서는 독립운동가로서 몇 년 동안 두 차례에 걸쳐 투옥되어 고문과 박해를 겪었고, 하염없이 묵주기도를 바치며 주님의 의로움을 꿋꿋이 지켜냈다.
그 중간에 교사생활을 하다가 37세의 늦은 나이에 의사가 되어 정화의원을 개원, 사재를 털어 병고에 시달리는 가난한 이들에게 예수님의 측은지심(惻隱之心)으로 다가가 아픈 상처를 싸매주고(루가 10,33-35 참조) 먹을 것을 나눠주었다.
해방 후에는 주님의 뜻을 헤아려 여성 지위 향상을 위해 광주구천주교회 유지재단의 도움으로 신성여학교(고등과정)를 설립해 초대교장이 되어 경천애인(敬天愛人)에 입각한 여성인재 양성에 주력하였다. 급기야 여성 최초로 초대 교육감이 되어 제주 교육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처럼 제주 근현대사에 혁혁한 족적(足跡)을 남기셨을 뿐 아니라, 생애 마지막까지 집 한 채 없이 청빈하게 순결한 수도자처럼 주님 안에서 기도와 봉사로 사셨다. 이에 세월을 더할수록 굽이굽이 주님을 향한 애절한 신앙이 녹아있는 삶의 향기가 짙게 배어 나온다.
최정숙님은 언필칭 그 옛날 신앙의 선조들이 목숨 바쳐 지켜낸 순교신앙을 오늘에 되살린 참된 복음의 증거자이다. 이는 제주교구를 넘어 한국교회 복음화의 밑거름이 아닐 수 없다. 복음화는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는 게 아니다. 더구나 교회제도와 체제유지에 급급해서 세상과 유리되거나, 성장 제일주의에 빠져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외면해선 더더욱 요원하다. 그것은 가슴에 복음을 품고 세상의 한복판으로 나가 예수님의 육화신비를 치열하게 살아가는데서 얻어지는 신앙의 결실이자 주님의 은혜인 것이다. 이제 수많은 복음의 증거자들을 기억하며 세속화의 그늘에서 벗어나 오롯이 예수님께 정향(定向)하고 이 땅의 참된 복음화를 이루기 위해, “자 일어나 가자”.(요한 14,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