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교회 안에는 과거 어느 때 보다 복음적 의미의 ‘하느님 나라’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고 있다. ‘하느님 나라’는 사랑으로 다스려지는 나라이다. 하느님은 당신의 ‘모성애(자비)’와 ‘부성애(정의)’를 통해 인간을 포함한 세상 모든 피조물들이 상호공존하고, 상호양육의 관계를 살도록 보살피신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에 대한 교회의 이해는 아직 많은 부분에서 ‘통치와 지배’, ‘효율성’이라는 과거형의 사고 구조에 영향을 받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본질이 망각된 법과 규칙들이 당대 사람들을 옥죄고 있음을 보시고, 십계명의 본질을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으로 간단하게 명료화했고 만민평등과 박애로써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대하셨다. 이런 생생한 체험을 간직한 초대 교회는 교회 구성원들 간의 관계가 가장 평등했고, 나눔과 친교로 공동체가 운영됐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잦은 분파와 이단의 발생으로 공동체 일치가 절실히 필요해지자, 교회는 점차 위계조직으로 변했다.
위계질서는 사제적 직무와 동일시됐으며 성직자 중심의 교회가 세워졌다.증가하는 신자를 보다 효율적으로 조직하고 운영하기 위해, 당시 절대주의 정치 체제를 모방한 수직적 중앙집권적 체제를 교회에 도입했다. 이는 복음적인 논거로 합법화됐다. 여기에 ‘유용성’과 ‘합리성’을 추구하는 사상이 가세하면서 교회는 ‘대형화·기업화’됐다. 공동생산과 공동분배를 목표로 하는 집단주의적 공산주의 통치보다는, 개인의 능력을 인정하고 자연스런 자본의 유동을 통해 이익이 분배되고 다수의 의견을 수렴하는 자유 민주주의 방식이 선호되고 있다.
그러나 교회는 전자로부터 인간 능력을 평준화(획일화-통일화)시키는 것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보았으며, 후자로부터 인간의 욕망과 자유를 무제한으로 추구하는 개인주의와 자유주의의 한계를 체험했다.
이 시기 교회는 수직적 위계질서와 민주화 사이에 갈등을 겪었다. 그리고 여기에 다시 제3의 방식, 즉 과학적으로도 인정된 네트워크(그물망)형의 새로운 양식을 접하고 있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변화 앞에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동료적 친교’라는 새로운 통치 방법을 제시했으며, 오늘날 그 어느 시대 보다 사회적 약자들과의 ‘연대’를 강조한다. 바야흐로 ‘하느님 나라’의 시민정신으로 자신의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중앙에 집중된 통치방식을 지역교회와 분담하고, ‘다양함 안에 하나’, ‘가난한 교회’ 라는 명제들을 화두로 가진다. 그러면 오늘날 제도로서의 한국교회의 상황은 어떠하며, 변화해야 할 점은 무엇인가?
우리는 성직 중심의 위계질서와 획일화-정형화된 집단주의적 구조 안에 실종된 ‘유연성’, ‘자율성’, ‘창의성’, ‘상호존중’, ‘책임분담’이라는 보화들을 발굴해야 한다. 비합리적인 방법과 이해관계를 통해 교회를 운용하는 것을 중단하고, 다방면의 의견을 듣고 토론하고 복음의 빛 안에서 식별하면서 ‘다름’을 수용하고 ‘하나’가 될 수 있는 친교의 장을 마련해야 한다.
이러한 담론이 문서, 혹은 학술 심포지엄용으로 남지 않으려면 ‘하느님 나라 시민정신’을 세 가지 측면에서 (하느님/이웃/물질) 길러야 한다.
즉 내 필요만이 아닌 우리의 필요를 지속적으로 ‘하느님께 청원’하고, 도움이 필요한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며’, ‘물질을 나누는 삶’이다. 지금 이 순간, 내가 매일 매일의 수고를 감수하고 살아가는 그 자리에서 비록 겨자씨 한 알만큼 작은 것일 지라도 하나씩 실행하면 ‘하느님 나라’는 백배 천배로 자라나, 그 풍성한 열매가 우리 사회에 곳곳에 미치게 될 것이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진정으로 거룩하게 성화되는 되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