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주 전 참석한 어느 인문학 강좌에서 청중 한 사람이 손을 번쩍 들고 이런 이야기를 했다. “저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됩니다. 좋은 대학 나오고 좋은 직장 다니는 부잣집 사람이 어떻게 대학도 안 나오고 집안 형편도 별로인 사람과 결혼할 수 있습니까? 서로 대화 자체가 안 될 텐데 어떻게 사랑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강사는 주제와 관계없는 질문이라며 애써 답변하지 않았지만, 듣고 있는 청중들 가운데 상당수가 그 의견에 동의한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어느새 이런 생각들이 보편적인 세상이 되어버렸구나 싶어 마음이 무거워졌다.
한동안 개·돼지 논란에 세상이 시끄러웠다. 어느 고위직 공무원이 평범한 대중을 개·돼지 취급하는 발언을 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그런데 내 주위 몇몇 사람들은 “대중들이 오죽하면 그런 이야기까지 나오겠느냐. 틀린 말이 아니다”라는 의견을 냈다. 모 신문에는 그런 말을 들은 대중들이 반성해야 할 문제라는 취지의 칼럼까지 나왔다. 세상 사람 누구나 인격적으로 존중받아야 하고, 재산이나 지위 등으로 평가받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내가 비정상인가 하는 생각에 혼란스러웠다.
아무리 세상의 기준이 그렇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가톨릭신자들은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사셨는가? 하느님이신 분께서 친히 인간이 되시어 화려한 곳도 아닌 가장 낮은 곳, 마구간에서 태어나셨다. 공생활 기간 동안 그분께서 만나고 다닌 사람들은 높은 지위의, 많은 재물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 시대에 인간 취급도 받지 못했던 여자, 병자, 창녀 등을 만나 그들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었다. 그분이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의 가치는 높은 지위에 오르고 많은 재물을 가진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가장 가난하고 힘들고 상처받은 이들도 하느님의 아들, 딸로서 존중받고 사랑받아야 한다는 메시지였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강조하신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가 바로 하느님 나라의 핵심 가치이며, 예수님께서는 그 가치를 선포하시다가 정치범으로 잡혀 십자가에 매달리셨다.
그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른다는 그리스도인이 권력과 돈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현세의 잘못된 기준을 따라야 할까? 우리는 권력과 돈에 집착하다가 자녀가 부모를 죽이고, 부모가 자녀를 죽이는 것이 점점 빈번해지는 비정상적인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지금 이 순간, 더 많은 재물과 더 높은 지위를 가져 개·돼지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을 가질 것이 아니라, 누구나 동등하게 존중받고 사랑받는 세상을 정착시킬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세상 그 누구도 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인이 앞장서야 한다. 십자가 죽음까지 감수해야 했던 예수님의 그 길을 따라야 하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이다.
이 베네딕토 osakaki@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