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이 무엇이냐고 하면, 대부분 ‘죽음’이라고 말한다. 이는 모든 생명체에 공통된 일이다. 지구상에는 현재 150만 종의 생명체가 자기 생명을 유지하고, 어떻게든 죽음을 막아 보려는 처절한 생존경쟁을 벌이고 있다. 그런데, 세상에는 죽음보다도 삶을 더 두려워하는 생명체도 있다. 바로 인간이다. 살아내야 할 삶의 고통이, 지금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보다 더 힘들다고 차라리 자살을 택하기도 하는 유일한 존재다.
알려진 것처럼, 우리나라는 하루 평균 40명이 자살하는, OECD 국가 중 어떤 나라보다도 자살률이 높은 자살공화국이 됐다. 이젠 자살이 사회문제가 되어 정부도 대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또 국가생명윤리위원회에서는 생명존중을 위한 헌장을 발표하면서, 전 국민에게 생명의 존엄함을 호소하고 있는 상황이 됐다. 왜 이리도 우리나라의 자살률이 특출나게 높을까?
학자들은 사회경제적 스트레스가 너무 과중한 탓이라고 말한다. 국내 자살자의 수는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급격히 증가했고, 신용카드 대란과 미국의 서브프라임 사태와 같은 사회경제적 혼란이 올 때마다 증가했다고 한다. 경제 악화나 소득불평등이 자살률 증가로 이어지는 것은 다른 나라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한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것은 외환위기가 지난 후 자살률이 높던 다른 나라들은 평균 30% 정도의 자살감소를 보이는데, 유독 한국만은 자살률이 계속 증가하고 있고, 특히 노인과 10대의 자살률이 높다는 것이다.
사회경제적 고통이 중요한 한 인자인 것은 분명 사실이다. 하지만 삶의 힘듦으로 따지자면, 우리 민족만큼 수난을 겪어낸 사람들이 또 많을까? 수많은 역사의 사건들을 거치면서 죽을힘을 다해 살아낸 민족이 아니던가? 또 심리학자인 빅터 프랭클린과 같은 사람은 죽음을 앞둔 가혹한 유다인 수용소에서 오히려 삶의 의미와 실존에 대한 커다란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자살의 문제를 단순히 사회 양극화의 고통만으로 설명하는 데는 한계가 있지 않은가?
여러 시각이 있겠지만,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우리사회가 경제가 성장하면서, 무척이나 각박하고, 여유 없이 쫓기고 있는 과정에서, 자신에 대해서뿐 아니라 동토에서 떨고 있는 예비 자살자들을 잘 품어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에 관련해 작고하신 정신분석가인 이동식 선생은 민족의 집단 신경증을 애기한 바 있다. 일제 36년을 견뎌내면서, 우리 민족은 자존감을 원천적으로 파괴당하는 집단정신적 트라우마를 얻었고, 이것이 무의식적으로 후세들의 정신세계까지 파고들어, 신경증(자기 자신 보다는 자기와 분리된 외적으로 드러나는 것에 의해 존재의 가치를 확인하는)의 잔재가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의 기준보다 남의 시각이 더 중요하고, 삶이 최소한 어떤 모양새 이상은 되어야 하고, 창피하게 사느니 죽는 게 낫고, 못난 것은 집단적으로 용서가 안 되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아직도 패권과 명성과, 과시를 추구하고, 손가락 끝에 묻은 물을 튀겨내듯, 남의 아픔을 외면하지만, 실은 자신의 좀 못난 모습조차 있는 그대로 품어내지 못하는 일종의 분열적 ‘고통’에 시달리면서 자신에게, 자녀들에게, 또, 남에게 상처를 주며 산다.
주위를 둘러보면, 새들도 벌레들도 살아있는 시간 내내, 먹이를 찾아 바삐 다니고, 천적의 위협에 늘 시달리며 쪼그려 새우잠을 자며 사는데, 그런 ‘형편없는’ 삶조차도 어떻게든 지켜내려고 안간힘을 기울이고 있다. 하느님이 세상만물을 창조하실 때, 이처럼 삶의 모든 시련과 고난과 행복을 함께 창조하셨다. 이렇게 곤고한 삶조차도 있는 그대로 소중하게 품어낼 수 있는 것이 피조물의 위대한 용기이다. 죽음보다도 삶이 더 두려워진, 역사 속의 상처와 집단적 신경증에서 아직 치유되지 못한 안타까운 이름표, ‘자살공화국’을 이젠 던져 버릴 때가 되지 않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