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에 손잡고, 벽을 넘어서 서로 서로 사랑하는 한마음 되자. 손잡고!” 1988년 9월 17일 코리아나의 노래 ‘손에 손잡고’가 전 세계에 울려 퍼졌다. 올림픽 사상 최대 규모인 159개국 8391명의 선수가 참가한 가운데 세계 축제의 화려한 막이 한국에서 열린 것이다. 88올림픽에는 공산권 국가가 대거 참가해 소련과 동독이 각각 1위와 2위를 차지했고 한국은 금메달 12개로 미국에 이어 종합순위 4위를 달성했다.
서울올림픽은 냉전의 산물인 6·25전쟁과 분단의 아픔을 딛고, ‘우리도 할 수 있다’는 한국인 특유의 저력을 ‘한강의 기적’과 ‘민주화의 봄’으로 세계만방에 알린 역사적 사건이었다. 또한 동서의 이념분쟁을 넘어 스포츠를 통한 화합과 감동을 선사해 갈등과 분열로 점철된 한반도 역사에 새로운 평화의 가능성을 제시함으로써 세계 속 한국의 위상을 재정립시키기도 했다.
성공적인 올림픽의 경험은 동구권 몰락이라는 격변의 시기와 맞물리며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특히 동서 화해모드를 마련하고자 1983년부터 사회주의 국가들을 올림픽에 적극 참가시킨 노태우 조직위원장이 6·29선언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전격 수용하고, ‘보통사람’이라는 슬로건으로 대통령에 당선된 제6공화국 출범에서부터다. 보통사람 노태우의 ‘특별한 통일비전’이 ‘북방정책’으로 현실화된 시점이기 때문이다.
북방정책은 중국, 소련 등의 사회주의국가와 관계를 개선해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유지하고, 경제협력을 통해 상호이익 증진과 남북한 교류·협력관계 발전을 추구한 ‘북방외교’였다. 북방정책의 궁극적 목표는 사회주의국가와의 외교정상화, 남북한 통일의 실현이었다. 실제, 노태우 전 대통령은 1989년 헝가리를 시작으로 퇴임 전 베트남 수교에 이르기까지 임기 5년간 37개의 공산국가와 수교를 맺어 새로운 국제질서를 형성했다.
북방정책 3단계에 따라 1990년 소련, 1992년에는 중국과의 수교를 통해 한국의 상대적 자율성을 높이면서 대북 압박의 국제공조를 형성시켜 나갔다. 수차례에 걸친 북한과의 고위급 회담으로 남북기본합의서에 서명했고 남북한 UN동시가입도 성사시켰다. 남북관계를 넘어 시베리아로 한민족 공동 생활권을 넓히기 위해 북방의 문을 계속해서 두드렸다. 이 모든 것이 한국 중심의 한반도 통일 기반 조성과 동아시아의 평화와 번영 그리고 민족통일로 가는 길을 열기 위함이었다.
북방정책의 결과, 노태우 정부 때는 북한의 도발이 단 한 차례도 없었다. 아웅산 테러사건, KAL기 폭파사건과 같은 국제범죄나 잠수함 침투, 서해 무력시위와 같은 도발도 없었다. 또한 북방정책의 시정목표인 ‘민족자존’과 ‘남한의 주도적 역할론’을 실현하고자 용산 미군기지의 이전을 추진했고 평시작전지휘권도 환수했다. 이처럼 노태우 전 대통령은 21세기가 되기 전, 통일이 올 것으로 내다보고 통일한국에 유리한 국제질서 형성을 위해 북방정책의 기조를 일관성 있게 추진했다. 불확실성에 빠진 남북관계. ‘보통사람’의 ‘특별한 통일비전’에 주목하는 이유다.
박현우(안셀모) 통일의 별(Uni Star)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