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나 지금이나 제주도의 가장 소중한 가치는 공동체의 화합(和合)과 상생(相生)이다. 이웃의 잔칫날에 누구나 1인분씩 접시에 음식을 담아주는 ‘반’(飯)문화를 보자. 남녀노소, 빈부격차를 가리지 않고 동등하게 서로 나누고 배려하는 정신을 담고 있다. 간혹 올레길을 걷다 숱하게 보는 ‘돌담’을 보자. 아무렇게 대충대충 쌓아올린 듯 보이나, 거센 바람에도 끄떡치 않을 만큼 단단하다. 힘센 이는 큰 돌을, 연약한 이는 작은 돌을 처지에 맞게 쌓아올리며 척박한 자연환경을 이겨낸 상부상조(相扶相助)의 표지다. ‘해녀’는 어떤가. 가난에서 벗어나 가족을 위해 차디찬 바다에 뛰어든 위대한 어머니이자, 늙고 약한 동료를 배려하여 함께 자치적으로 작업하고 수익을 나누는 수눌음(품앗이)으로 지금의 제주공동체를 있게 한 든든한 버팀목이다.
이것은 역사의 그루터기마다 제주를 제주답게 굳건히 곧추세운 웅비(雄飛)의 가치이다. 조선시대 인조7년(1629년)부터 순조25년(1825년)까지 제주도는 출륙금지가 내려져 육지와 내방할 수 없는 절해고도(絶海孤島)이자 유배의 섬이 된다. 여기다 극심한 흉년마저 들어 기근(飢饉)에 허덕이다 속절없이 죽는 이가 속출한다. 이때 제주여인 김만덕(金萬德)이 나서 굶주리고 헐벗은 도민들을 위해 전 재산을 팔아 쌀을 사서 구제(救濟)하고, 도민들도 서로서로 측은지심(惻隱之心)으로 유배 온 이들마저 아우르면서 고향산천을 지켜낸다. 일제강점기엔 독립만세운동을 거세게 펼치며 조국의 독립에 크게 이바지한다.
해방되어 몇 년 지나 제주 현대사(史)에 가장 비극적인 4·3사건이 발생한다. 좌우이념의 다툼 속에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무고한 내 부모형제들이 무수히 죽임을 당한 반인륜적 범죄인 제노사이드(Genocide)다. 마을과 집집마다 희생되지 않은 이가 없을 정도로 참혹하게 파괴된 것이다. 그 후, 수십 년에 걸쳐 숨죽여 피눈물을 흘려야 하는 가혹한 질곡(桎梏)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하지만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이 뒤따른다. 드디어 2003년 10월 31일에 대통령께서 제주도민을 향해 공식 사과하기에 이른다. 아프고 슬픈 진실을 가슴에 품고 서로를 보듬고 다독이며 인동초(忍冬草)처럼 다시 일어선 것이다. 불순한 이념적 덧칠로 갈등과 분열을 야기해도 4·3의 진실은 가리지 못한다. 도리어 선명히 드러나 다시는 그런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후손 대대로 기억될 것이다.
이처럼 제주도는 나눔과 배려, 자비와 애향정신 등으로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어왔다. 하지만 불과 십여 년 전부터 개발의 열풍이 불면서 자연이 무분별하게 파헤쳐지고 물욕과 이기심의 그늘이 깊게 드리워졌다. 어느 순간부터 강력 범죄들이 잦고 서로 돕는 수눌음처럼 소중한 공동체 정신이 빛을 바래어갔다. 이런저런 지역의 현실을 마주하고 제주교구는 2003년부터 소공동체를 통해 지역사회와 함께 어우러지는 여정을 걸어왔다. 친교와 나눔의 초대교회 정신을 오늘에 되살려 세속화의 물결로 흔들리는 교회의 정체성도 회복하고, 위기에 처한 제주공동체를 새롭게 일깨우기 위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우여곡절도 많았고 세속화의 파고가 깊고도 넓어 속수무책인 경우도 있었다.
반면 하느님 뜻에 반(反)하는 것들을 조금씩 변화시키고 바로잡는 은혜의 열매도 맺었다. 아직 갈 길은 멀고도 험하다. 하지만 오로지 주님께 정향(定向)하고 어떤 난관이 있어도 친교와 일치, 나눔과 배려의 공동체를 이루어 세속화의 장막을 거둬낼 그날까지 뚜벅뚜벅 걸어갈 것이리라. 비단 이것은 우리 제주교구를 넘어 교회전체에 맡겨진 시대적 요청이기에 함께 마음과 지혜를 모으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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