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이후 분단으로 인한 가장 큰 피해자는 역시 이산가족들일 것이다. 가족, 친지들과 헤어져 남한 또는 북한에 거주하는 이산가족들은 1980년대부터 가족상봉행사를 가졌다. 35년 동안 가족상봉 신청자 13만920명 중 가족과 대면상봉한 사람들은 총 4677가족 2만3519명이다. 이것은 20차례의 직접상봉과 7차례의 화상을 통해 만난 557가족 3746명을 합한 숫자다.
현재 이산가족 상봉을 신청한 분들 중 절반을 상회하는 6만8083명이 사망했다. 그리고 70세 이상의 이산가족이 80%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므로 앞으로 20년 이내 거의 모든 이산가족들이 소멸할 것이라 예상된다.
우리나라의 서북단에 위치한 교동도는 6·25때에 황해도 연백군에서 피난 오신 실향민들의 집성촌이다. 3만여 명의 연백군민들이 전시에 폭격을 피해 앞 동네였던 교동도로 잠시 피난을 온 것인데 60여 년의 세월이 흘러간 것이다. 실향민 대부분의 고향이었던 연백평야는 38선 이남에 속해 있었으나, 정전협정에서 한강하구가 분단선이 됐기 때문에 연백군이 북한땅이 되면서 고향에 돌아갈 수 없게 된 분들이다. 휴전 당시만 해도 많은 분들이 고향에 있는 가족들을 만나거나 식량을 구하기 위해 연백을 드나들었지만, 점차 경계가 심해지고 이념논쟁이 격해지면서 가족이 있는 고향에 영영 돌아갈 수 없게 됐다. 교동도는 휴전 후 한때 원주민들과 피난민들이 혼재하며 혼란의 시기를 겪었다. 이들 중에는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계로 감정의 골이 깊어진 채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 가족 일부가 북한에 남아 있던 많은 사람들이 불순세력으로 오해를 받아 집단으로 희생되는 일들도 일어났다.
인민군을 퇴출하기 위한 아군의 폭격을 피해 목숨을 부지하려 잠시 피난 왔던 교동도였다. 하지만 가족상봉을 염원하며 고향에 들어갈 날을 기다리던 실향민들은 다시 이웃의 신고로 목숨을 잃게 된 가슴 아픈 사연들을 간직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동도 주민들은 생존을 위해 서로 하나가 돼서 척박한 묵은 땅을 일궈 식량을 생산하고, 화개산 자락에 형성된 난민촌에 생계형시장을 만들어 경제를 활성화시키며 성실하게 살아왔다.
실향민들은 낯선 땅에서 고향의 농사기술을 이전해 교동도 주민들과 함께 교동도를 청정 평화의 섬으로 간척하며 살아온 것이다. 제비가 날라다 주는 고향의 흙내음을 맡으며 마음의 위로를 느끼고 살아온 교동도 실향민들의 이야기에는 아름답고 소중한 화합의 삶이 녹아 있다. 2014년 7월 교동대교가 개통이 된 후 많은 단체들과 학생들이 교동도를 찾고 있다. 전쟁으로 인한 분노를 화합과 포용의 정신으로 전환해 교동도를 평화의 섬으로 가꿔 주신 실향민 어르신들의 이야기는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준다. 우리가 희망하는 통일은, 70년을 다르게 살아온 사람들이 서로 다름을 인정하며 화합과 포용의 정신으로 적대감을 극복하고 서로의 아픔을 보듬고 함께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김영애(데레사) (사)새우리누리 평화운동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