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우리 주변에는 어렵고 힘든 이웃들이 참 많습니다. 어떤 이들은 경제적인 생활고(苦)에 허덕이고 또 어떤 이들은 불치의 병이나 가정불화 등등 고통과 상처 속에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갑니다. 나름대로 온 힘을 다해 아등바등 살아보려 애써 봐도 세상의 벽은 너무도 높고 단단하고 차갑습니다. 여기다 해를 더할수록 세상의 인심마저 각박해져 그들의 어깨를 축 처지게 합니다. 그 어느 때보다 깊은 실의에 젖어 사회의 변두리에 사는 이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쏟으며, 예언자적 증거의 삶을 통해 그들과 연대할 때입니다.(일어나 비추어라 24쪽 참조)
몇 년 전 유난히 잔상(殘像)이 오래 남은 한 공익광고가 떠오릅니다. 그것은 ‘단 몇 초의 사랑이 세상을 아름답게 한다’는 내용입니다. 어떤 젊은이가 새벽 일찍 신문배달을 합니다. 어느 집에 다다르자 담이 굉장히 높았습니다. 그래서 사력을 다해 신문을 위로 내던져 봅니다. 힘이 달려서인지 그만 신문이 담을 넘지 못하고 땅바닥으로 떨어지고 맙니다. 바로 그때 한 중년의 남자가 그 곁을 지나다가 신문을 집어 듭니다. 그리곤 힘껏 신문을 담 위로 내던져 집안에 넘겨줍니다. 청년이 이를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그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감돕니다. 그 시간은 단 6초에 불과합니다.
그 짧은 몇 초의 사랑으로 기쁨을 맛본 젊은이의 속내를 상상해 봅니다. 아마도 “세상은 살만한 가치가 있고, 지금 어렵고 힘들어도 결코 외롭지 않아. 나를 이해해주고 함께해주는 이들이 있잖아. 열심히 살아야지”라고 되뇌이면서 크나큰 위로와 격려를 느꼈을 것입니다. 좀 더 긍정적이고 열린 마음으로 삶을 대하며, 아무리 지치고 힘들어도 좌절하지 않고 희망을 일구며 꿋꿋이 살아갈 굳은 용기와 힘마저 얻었으리라. 이처럼 타인의 처지에 공감과 배려를 아끼지 않는 작은 사랑일지언정 누군가에겐 기쁨과 희망을 넘어 너무도 굵고 튼튼한 은총의 동아줄이 되지 않나 싶습니다.
주님께서는 겨자씨의 비유(마태 13,31-31)로 작은 사랑의 위대함을 확인해줍니다. 겨자씨는 손에 올려놓으면 보일 듯 말 듯한 작디작은 씨앗입니다. 하지만 이게 땅에 떨어져 발아(發芽)하여 자라면 나무가 되어 열매를 맺습니다. 그 후에 온갖 새들이 깃들어 노니는 안식처가 됩니다. 이웃 사랑 역시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처음엔 겨자씨처럼 작디작은 모습으로 타인의 영혼 안에 뿌려집니다. 하지만 아프고 힘들어 닫힌 그들 영혼의 문을 서서히 녹여 다시 일어서게 해줍니다. 급기야는 나무가 되어 열매를 맺듯 삶의 기쁨과 행복을 가져다주는 은총의 반전마저 이루게 해줍니다.
우리는 지난 2014년 8월 중순, 교종 프란치스코의 방한을 통해 이를 절절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분을 모시고 4박5일 동안 너무도 기쁘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교종께서는 스스로 자신을 낮추시어 작은 이의 모습으로 다가오셨습니다. 가시는 곳마다 사랑의 작은 씨앗들을 뿌리셨습니다. 특별히 세월호 희생자 유가족을 만나 억울하고 아픈 절규를 들어주시고, 장애인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어 기도해주시고, 위안부 할머니들의 손을 잡아 주셨습니다. 거창하고 왁자지껄하기보다 섬세하면서 작은 사랑으로 이 땅의 많은 가난하고 상처받은 이들에게 참된 위로를 주시고, 아픔과 고통을 딛고 다시 일어서 살아갈 힘을 주신 것입니다.
이로써 교종께서는 번영과 웰빙에 안주하는 교회가 아닌 가난하고 상처받은 작은 이들과 연대하는 참된 교회의 모습을 몸소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이들의 교회,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란 사도적 이상을 실현하는 것으로,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가 지금 여기에서 걸어가야 할 작은 사랑의 길이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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