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히 앉아 생각에 잠겨본다. 우리는 이렇게 복잡한 가운데 무언가도 확실히 모르는 상태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전해 들으면서 살아가고 있는데 예수님 살아계실 때는 시대가 어떠했을까?
로마의 속국으로 독립을 위해 여러 방면으로의 저항도 있었으리라 생각되고 타협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혁명당원이란 무엇인가? 성경에도 혁명당원이란 단어는 여러 번 등장하고 주님 대신 풀려난 바랍바도 그들 가운데 한사람이라 알고 있다.
맏이를 성전에 봉헌하는 예물의 등급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빈부격차도 현재의 우리들과 비교해 얼마나 좋은 편이었을까?
민족의 염원이 우선 독립하고 백성들이 먹고살기에 걱정 없는 부유한 나라를 이루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이것들을 이루어 줄 대상자가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였으리라….
주님께서는 그곳 출신이면 촌놈이라고 멸시를 당하는 작은 시골마을에서, 거기서도 가장 비천하게 태어나셨으며, 그래도 항상 찾고 기다리던 사람들에게는 알아보게 하셨지만 가난한 시골마을에서 목수 일을 도우시며 사시다가 공생활에서도 주위의 혁명당원들의 일에는 무관하게 병들고 소외된 이들, 고통 중의 약자들을 위로해 주시고 치유해 주시며 자선과 회개로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라고 가르친다.
제자로 부르신 혁명당원들도 여러분이지만 주님께서는 세금 한 푼도 시빗거리가 되는 것을 좋아하시지 않을 정도로 혁명당원들의 염원에는 무관심하셨던 것인가?
배반자로 부르는 유다스는 어쩌면 스승이신 예수님의 요지부동하심에 아마 극단적인 절박한 상황으로 몰아 협조를 이끌려던 것이 순한 양처럼 끌려가시는 스승님을 보고 자신의 행동에 대한 절망감과 충격으로 자살의 길을 선택한 것은 아닐까? 그때 잘못을 뉘우치고 예수님께 돌아와 용서를 청했더라면….
지금의 나 또한 나 자신의 편협된 생각으로 주님을 극단적인 절박한 상황으로 모시게 되는 일은 없는지 자비의 희년을 마치고 주님 오심을 기다리며 생각에 잠겨본다.
일상생활 중에 나 자신이 습관적으로 이웃에게 혹은 나라에 불만스런 생각을 가지고 불평을 늘어놓지는 않았는지…. 나 자신의 불만스런 생각이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질병에도 가족력이 있듯 생각이나 말의 방향에도 가족력이 없을까? 타성에 젖은 일상생활에서 모르는 사이에 거기에 젖어버린 아무 느낌 없는 상태로 부정적인 생각의 틀로 바라보는…?
자비의 원천이신 주님, 저희의 일상생활 속에서 부정적인 생각보다는 긍정적인 생각으로 이웃을 축복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게 하시어 서로가 자비로워지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