떨리는 손으로 첫째 아이의 탯줄을 끊던 때가 바로 엊그제 같은데, 벌써 청소년 시기 아이가 둘이나 된다. 이 아이들과 아침부터 저녁까지 함께 밥도 먹고 운동도 하고 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지낸다. 생물학적으로만 보면 너무나 자연스런 아빠의 모습인데, 요즘 들어서 진짜로 아빠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 보곤 한다. 실제로 “내가 언제부터 아빠였지?”라는 엉뚱한 질문도 하면서 말이다.
아빠로서의 정체성에 대해 다시 질문하게 되는 것은 주로 아이들과 대화하는 가운데 발생한다. 엄마 젖만 빨던 아이가 어느 날부터인가 질문도 하고 이것 해 달라 저것 해 달라는 요구를 하게 되면 진짜 아빠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특히, 아이가 청소년기에 들어서서는 짜증을 내거나 자신의 감정을 격정적으로 표현할 때면, 그때까지의 아빠 역할에 대해 의문이 생기게 된다. 게다가 아빠가 잘못했다는 식의 지적까지 받게 되면 부모 노릇하기가 만만치 않음을 깨닫게 된다.
그러다가 아주 오래전 읽었던 시 중에서, “그대의 아이는 그대의 것이 아닙니다. 그대를 통해서 이 세상에 왔지만 그대로부터 온 것은 아닙니다”라는 문구가 떠올랐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새삼 가슴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내용이다. 사실, ‘내 아이’란 없고, 아이들은 부모를 통해 이 세상에 왔을 뿐이다.
이제 아이들에게 필요한 부모의 역할은 스스로 성장하도록 도와주고 촉진해 주는 것임을 알게 된다. 어차피 아이들은 자기 나름의 비전을 가지고 살아갈 것이기에, 부모로서 해줄 일은 그러한 방향에서 크게 엇나가지 않도록 지켜봐 주는 일이다. 이런 식으로 이해한 부모 역할을 생활 속에서 확인할 때가 있는데, 우리 집 경우 가족여행이 여기에 해당된다.
여러 해 전, 중1이 된 첫째 아이가 초등학교 4학년인 동생을 데리고 전주여행을 떠났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 전주의 지리, 교통, 식당, 방문 장소 등을 찾고, 어떤 이동수단으로 어떻게 찾아갈지 등도 자신들이 결정을 했다. 이 과정에서 우리 부부가 한 일은 새마을호 열차 두 장을 끊어주고 기차역으로 가는 전철역까지 데려다준 것이었다. 나머지는 자기들이 알아서 전주역까지 찾아갔고, 원래 계획에 따라 자신들만의 일정을 보냈다. 그리고 우리는 오후 늦게 전동성당에 도착해서 약속된 시간에 아이들과 만났다.
아이들은 이미 자기들이 준비한 여행에 우리를 초대하고 있었다. 그 초대된 여행을 통해 이제 아이들은 자기들만의 리듬이 있음을 알게 되었고, 부모의 역할 또한 많이 바뀌어야 함을 발견했다. 아마도 머지않아 국내의 더 많은 도시 방문은 물론 해외여행까지 준비하고, 결국 이런 식의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인생계획도 짜게 될 것이라 믿는다.
물론 아이들의 성장 과정에서 모든 것을 다 맡긴 것은 아니다. 특별히, 마땅히 가르쳐야 할 내용이나 더불어 함께하는 부분은 싫은 느낌이 들더라도 참고 견뎌야 함을 가르쳤다. 예를 들면 매주 미사에 가고 고해성사도 빼먹지 않는 것이다. 이런 것은 말로만 해서는 안 되기에 가족 모두 함께 고해성사를 보고 미사에 참례하기도 한다. 그래서 아이들은 자기 스스로의 성장을 위한 자양분을 머리로만이 아니라 몸으로도 얻게 된다.
부모로서 산다는 것은 당연 쉽지 않은 일이다.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무언가 모범을 보여야만 할 것 같고 정답을 가르쳐 주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여기에 더해 ‘내 아이’라는 생각까지 하게 되면 정말 힘든 여정이 될 수도 있다.
이제 이런 식의 생각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아이들은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이기에 스스로 성장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나머지는 하느님의 은혜에 맡길 일이다.
야곱이 “하느님께서 당신의 이 종에게 은혜로이 주신 아이들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창세기 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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