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첫 출근하던 날 파출소 앞을 지나다 벽에 걸린 문구를 봤다. ‘비정상의 정상화’. 곧 80년대 파출소에 붙어있던 구호 ‘정의사회구현’을 떠올렸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날 저녁 뉴스에서 박근혜를 비난하는 전두환의 말을 들었다. 뭘 잘 모르는 사람이 참모 말을 안 듣고 제멋대로 설쳐대서 나라가 망하게 생겼다. 나는 그러지 않았다는 말이었다. 또 웃음이 나왔다.
작년 말 불과 10번의 집회를 통해 천만 시민의 촛불이 켜졌다. 사상 초유로 국정을 농단한 박근혜·최순실을 비롯한 구체제를 무너뜨리고 새 세상을 설계하자는 외침이 광장을 가득 메웠다. 광화문을 향하는 지하철에서부터 느껴지는 사람들의 온기는 광장에서 더욱 따뜻했다. 나중에 누가 물으면 ‘그해 겨울은 따뜻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동안 시민들은 오늘의 절망과 내일의 두려움 속에서 종말론적 파국을 암시하는 수사를 퍼냈다. ‘헬조선’부터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 그리고 흙수저와 금수저의 수저계급론 등 사회 곳곳에 허무와 자괴감이 넘쳤다. 너나 할 것 없이 일상의 시민들은 신자유주의가 만들어낸 승자독식체제의 희생양이 됐다. 그런데 오히려 그 고약한 체제가 용인한 ‘박근혜’와 ‘최순실’로 인해 파국을 넘어설 수 있는 연대의 촛불과 구원의 행렬이 만들어졌다. 껍데기가 까발려지자 주말의 광장은 절망에서 희망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넘어가는 파스카 행렬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주말을 보낸 월요일의 일상은 다시 고단하고 절망은 여전했다. 마치 주일의 환대와 기쁨이 월요일로 이어지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의 시간 같았다. 실존주의 선구자로 불리는 덴마크의 키에르케고르는, 복음은 일요일이 아닌 월요일에 선포되어야 한다고 했다. 복음의 현실은 일상에서 더욱 강력해져야 한다는 말이겠다.
새해 첫날 탄핵소추 상태인 박근혜 대통령은 청와대 출입기자들을 불러 모아 멋들어진 상춘재에서 간담회를 가졌다. 그녀는 탄핵법정이 마련한 공개변론의 기회는 발로 차버리고, 노트북과 카메라 없이 무장해제된 기자들에게 자기변명을 늘어놓았다. 변명은 장광설이었지만 대통령으로서 할 일을 다 했는데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는 말로 요약된다. 시민들은 박근혜 대통령이 ‘사이비 대통령’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다른’ 사이비(似而非)를 공자는 무척 싫어했다고 한다. 공자가 사이비를 싫어한 이유는 의(義)와 신(信)을 어지럽히기 때문이라 했다. 이런 사이비를 공자는 향원(鄕原)에게서 보며, ‘덕을 해치는 자’(맹자, 진심편), 또 ‘덕의 도둑’이라했다(논어, 양화편). 입술로만 하느님을 고백하는 바리사이와 같다고나 할까. 사이비는 언제나 그렇게 정의와 진실을 왜곡한다. 우리 시대의 왜곡과 조작 그리고 은폐, 그 결정판은 ‘세월호’였다. ‘세월호 7시간’의 당사자가 진실을 풀어내면 그만인 것을 왜 오천만의 국민이 온갖 스트레스를 견디면서 진실을 찾아 애를 써야 하는가. 결국 시민들은 ‘자로’처럼 껍데기를 부수고 감추어진 진실을 찾아갈 것이다.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고,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2000여 년 전 예수의 시대에도 사이비가 많았다. 그 사이비들은 하느님이 보시기에 좋은 환대와 연대의 공동체를 무너뜨리고, 우상이 통제하는 지배와 예속의 체제를 구축했다. 예수께서는 40일의 광야생활을 통해서 자신을 성찰했고, 가난한 동네 갈릴래아에서 시대의 징표를 통찰했다. 주일의 복음이 월요일의 세상으로 나아간 것이다. 말씀이 세상으로 나아가자 사이비들은 단지 예수가 누구이신지 그들 기득권의 잣대로 확인하려 했다. 예수는 사이비들의 범주에 들어가실 인물이 아니었다. 예수께서는 카오스를 코스모스로 만드신 하느님의 유일한 아들이 아니시던가. 혼란의 시대, 새 술을 새 부대에 담으려는 시민들과 함께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사이비를 볼 줄 아는 지혜를 예수께 청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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