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닭의 해’라는 정유년(丁酉年) 첫날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미사에 참석했다. 이날 신부님은 서울의 한 성당 지붕에 있는 닭 모양의 조각 이야기로 강론을 시작했다. 어둠을 깨고 아침을 알리는 닭은 가톨릭에서 신앙과 희망을 증명하는 동물로도 여겨진다고 한다.
조금 엉뚱할 수도 있지만 강론을 듣는데 문득 영화 ‘곡성’이 떠올랐다. 아수라 같은 혼란의 밤을 보낸 주인공은 세 번의 닭 울음소리를 듣고 그제야 재앙의 끝을 본다. 닭이 묵묵히 견디어 깨버리는 어둠은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처럼 참담한 암흑의 세계려니 싶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도 밤을 견디고 새벽을 맞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겟세마니에서의 기도 장면이 그렇다. 예수님은 유다의 배반으로 잡혀가기 전날 밤을 ‘핏방울처럼’ 땀 흘리며 기도로 보냈다.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라며 말이다.
그런 예수님이 기도 후에 본 장면은 제자들의 잠든 모습이었다. 예수님은 “왜 자고 있느냐?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일어나 기도하여라”고 제자들을 다그친다. (루카 22,46) 필자는 예전부터 이 구절을 읽을 때면 왠지 부끄러운 마음이 들곤 했다. 곧 죽음이 닥칠 스승을 두고 어둠에 몸을 풀어버린 제자가 된 것 같기 때문이다.
만약 지금 한반도의 분단 현실에 무관심하다면 그 역시 어둠에 몸을 풀어버린 모습이 아닐까 싶다. 특히 이산가족을 떠올리면 분단은 절체절명의 시간이 걸린 문제임이 분명하다. 이미 고령이 된 이산 1세대는 많은 분들이 세상을 뜨고 있다. 급기야 작년부터는 이산가족 상봉 신청자 중 살아 있는 사람보다 사망한 사람의 수가 더 많아졌다. 1988년 첫 집계 후 신청자는 총 13만900여 명인데 생존자는 절반이 채 안 되는 6만3000여 명에 불과해진 것이다.
게다가 운 좋게 이산가족 상봉에 당첨됐던 분들 중엔 여전히 응어리를 안은 채 사는 경우도 있다. 특히 상봉을 경험한 사람들 가운데 반가운 마음이 든 것은 당연했지만 북쪽 가족의 다른 사고방식과 생활습관에 이질감을 느꼈다는 경험담이 꽤 있다. “만나는 시간이 더 길었으면 달랐을 것”이라면서도 “재상봉에 대한 기대는 접었다”고 말한 90대 노인의 담담한 회고에 먹먹함을 느꼈던 기억이 난다.
아직까지 정례적인 제도로 자리 잡지 못한 이산가족 상봉은 남북대화를 전제로 한다. 수십 년 동안 남북당국은 대화부터 성사시키고 비로소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시기와 규모 등을 논의하는 방식을 되풀이했다. 이산가족 간 생사 확인과 서신 왕래 등을 하는 방안도 오래전부터 제기됐지만 좀처럼 이뤄지지 않고 있다. 하루빨리 경색된 남북관계부터 풀려야 하는 이유다. 이산의 아픔을 가슴 한편에 묻고 살았을 분들에게 올해는 모처럼 밝은 소식이 들려오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