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그리스도인인가?’ 예전에 서구의 한 신학자가 동일한 물음의 책을 낸 일이 있다. 어지러운 시대를 살아가며 스스로 다시 묻게 된다. 우선 부끄럽다. 그리스도인답지 못해 부끄럽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과거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하여 깨우쳐야 할 요리문답 제1문에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있었다. 사람이 무엇을 위하여 세상에 났느뇨? 답은 사람이 천주를 알아 흠숭하고 자기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세상에 났느니라. 이 짤막한 질문과 답변에 왜 그리스도인인가에 대한 가르침이 함축돼 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까닭은 자기 존재의 근원을 알고 자기를 완성하는 데 있다. 이 두 가지 삶의 목적은 표현은 다르나 그 의미는 사실은 하나이다. 즉 사람답게 사는 데 있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바로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신념이다. 이 신념을 함께하는 사람들의 공동체가 교회다. 완전함을 향한 여정에 들어선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6)라는 말씀을 통해 우리가 나아갈 바를 분명하게 가르쳐주셨다. 예수께서 사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그리스도로 드러난 그 길이다. 우리도 나답게 삶으로써 각자가 고유하게 그리스도인으로 드러날 그 길이다. 예수께서 보여주셨듯이 나의 온전한 모습이 드러나는 길은 평탄한 길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그 시대의 풍조를 마주하고 거스르며 살아 나아가야 하는 고통의 여정이다. 한국교회를 창설하신 신앙의 선조는 진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가장 모범적인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여주셨다. 우리는 이 의로운 신앙에 힘입어 거룩하고 공번되고 전승된 교회의 참모습을 유산으로 물려받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유산의 상속자인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시대를 넘어 변함없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가르침인 하느님의 나라를 구현하는 일이다.
그런데 오늘 그리스도인으로 살고자 하면서 당면하게 되는 가장 어려운 일은 교회 안에서 가르침에 어긋나는 역풍을 마주할 때다. 하느님의 정의를 구현하고 진리의 길로 나아가려고 할 때 교우들 사이에 상존하는 역풍은 우리를 깊은 고뇌에 빠져들게 한다.
이러한 갈등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예수님의 시대에도 시대의 징조를 분별하지 못하고 예수님을 적대시한 두 부류의 유다인들이 있었다. 사두가이파 사람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다. 사두가이는 현세적이고 정치권력과 타협하는 신앙인이었다. 반면에 바리사이는 내세를 위해 율법만을 강조해 사람을 잃었던 극단적인 신앙인이었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왜곡된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정치권력과 타협한 신앙인들과 세상사에 무관심하고 오로지 개인의 구원만을 추구하는 신앙인들이다. 이들로 말미암아 우리교회는 표류하고 있다.
무엇이 정의로운지 분별하는 일은 교회의 가르침에 준해서 판단해야 할 일이다. 이점에서 예언자들의 외침과 같은 사목자들의 판단은 신자들에게 매우 중요하다. 사제들은 하느님과 맺은 생명과 평화의 계약으로 그의 입에는 진리의 법이 있고, 그의 입술에는 불의가 없으며, 주님과 함께 평화롭고 바르게 걸으며 많은 이들을 악에서 돌아서게 할(말라 1,6) 의무가 있다. 사목자들이 침묵하면 신자들은 더 깊은 소용돌이에 빠져들고 말 것이다. 신자들 사이에서 서로 다른 가치관을 인정하는 것은 아름다운 하느님의 나라를 구현하기 위해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진리를 거스르는 일은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기를 거부하는 행위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사와 세상의 구원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하느님의 정의가 세상에 구현되고 있는지 깨어 살펴야 하고 나의 역할이 무엇인지 기도하며 성찰하고 행동해야 한다. 이렇게 부단히 깨어 묻고 사는 가운데 비로소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서서히 드러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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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향만(베드로) 가톨릭대 의대 인문사회의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