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돌아오는 설이지만 올해 설이 유독 각별하게 느껴질 사람들이 있다. 바로 개성공단 기업 관계자들이다. 이들은 작년 설 연휴에 정부로부터 북한의 핵실험 강행을 이유로 개성공단을 폐쇄한다는 통보를 받았다. 설이 지난 뒤 정부측과 만나 향후 개성공단 운영에 대한 협상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던 중 들려 온 비보였다. 개성공단 기업인들은 부랴부랴 북측 사업장에서 피난 가듯 철수해야 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지금까지 개성공단은 가동이 중단된 상태다.
얼마 전 개성공단 기업인들이 피해보상과 가동 재개를 요구하며 시작한 천막 농성장을 찾았다. 한낮 기온이 영하를 기록한 날,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 설치된 천막 안은 싸한 기운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한때 건실한 기업체의 대표였던 분들은 점퍼와 담요에만 의지한 채 길고 힘겨운 시간을 버티는 모습이었다. 실제로 많은 개성공단 기업인들은 공단이 폐쇄된 후 일용직을 전전하거나 아예 무보수일 정도로 심각한 상황에 놓여있다. 심지어 처지를 비관해 음독자살을 기도한 기업체 대표도 있었다.
이날 꽁꽁 언 손으로 타자를 치면서 사연을 듣다 보니 문득 궁금증이 생겼다. 이렇게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고 길거리에 나앉았는데 정말 개성공단이 재개되길 바랄까, 만약 다시 가동된다고 해도 개성의 ‘개’자만 들어도 치가 떨리진 않을까 싶었다. 그러나 질문을 들은 개성공단 기업인들은 한치의 고민도 없이 답했다. “다시 가야죠, 가고 싶어요”라고 말하던 한 개성공단 기업 대표의 얼굴엔 마치 고향을 떠올리듯 순박한 표정마저 스쳐 지나갔다.
서울에서 개성까지의 거리는 60km로 부산보다 가깝다. 그러나 갈 수 없는 곳이 돼버린 개성은 어느새 고향처럼 아련한 곳이 됐는지 모른다. 또 다른 개성공단 기업인은 “처음엔 북한사람들에게서 입 냄새며 머리 냄새가 너무 심해 대화를 못 할 지경이었다”며 “샤워시설을 지었더니 나중엔 누가 북한사람인지 모를 정도로 변했다. 그렇게 북한 주민이, 북한이 변하는 게 보였는데 이렇게 멈춰버려 참 아쉽다”고 심정을 털어놓았다. 비단 이날 천막 안에 있던 분들만이 아니라 많은 개성공단 관계자들은 여러 경로를 통해 직접 눈으로 확인한 북한의 변화를 증언해 왔다.
개성은 6·25전쟁 때도 화해의 장이 열린 도시다.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7월 판문점보다 먼저 휴전협상이 열렸다. 물론 개성공단을 통한 외화벌이가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로 이어질 수 있다는 문제제기도 간과할 수는 없다. 그러나 사실상 유일한 남북 공존지대였던 개성의 맥을 끊어버리는 게 ‘최선’이었는지는 다시 논의할 필요가 있다. “이루어지지 않은 희망은 마음을 아프게 하지만 이루어진 소망은 생명의 나무가 된다.(잠언13,12)” 이 성경구절처럼 훗날 통일이 된 후 우리 사회가 개성공단을 ‘생명의 나무’로 기억할 수 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