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크고 작은 매듭을 지어야 할 때가 자주 찾아온다. 마치 바느질을 하자면, 바늘에 실을 꿰어 그 끝을 매듭지어야 하는 이치와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그 매듭은 바느질의 시작으로 볼 수도 있고, 실의 끄트머리로 볼 수도 있다. 한 가지 예를 더 들어보자. 학교생활을 하다 보면 끊임없이 수료와 졸업의 연속을 맞게 된다. 1학년의 수료는 2학년의 시작이요, 4학년 졸업은 사회생활의 시작이다. 이러한 삶의 마디마디에서 우리는 사진을 찍고, 밥 대신에 떡을 먹으며, 빵 대신 케이크를 자르고, 술을 마시고, 밤새 디스코테크에서 흔들기도 한다. 아무튼 평소와는 달리 유난스런 일들을 벌인다. 한편으로 사진을 찍어 두고두고 기억하려고 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 술에 취하고 춤을 춤으로써 어서어서 잊어버리려고도 한다. 인생은 부조리라더니, 얼핏 앞뒤가 안 맞는 듯도 하다.
그러나 이런 현상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한쪽에서는 아쉽고 부족했던 과거사를 빨리 잊어버리고픈 회한이 표현되면서 또 다른 마음 한구석에는 흐트러졌던 삶을 다시 한번 정리해 앞날을 기약하려는 다짐이 표출됨을 볼 수 있다. 건물에 금이 가서 틈바구니가 생기면 위험하듯이, 삶이라는 건물의 벽에 생기는 틈새도 이렇게 사람들에게 위기감을 조성한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마귀는 틈새를 노린다』라는 속담이 생기기도 하였다. 이러한 삶의 틈바구니, 간극(間隙)의 위기를 잘 정리하여 무사히 넘기고 새로운 도약을 이루기 위하여 대다수의 종교들은 통과의례(通過儀禮, rite de passage)를 가지고 있다. 흔히 말하는 관혼상제가 바로 그것이다. 어린아이에서 어른으로 넘어가는 틈새를 잘 메꾸려고 관례(冠禮)라는 성인식이 거행되며, 동질집단으로서의 자기 가족의 품 안에 안주해 있다가 이질집단으로부터 배우자를 취하여 새로운 단위사회를 형성하는 혼례, 이승에서 저승으로의 유월(逾越)인 상례, 이 세상 인간으로부터 저 사상의 신격으로 전환하는 제례 등이 바로 인간사 제반 전환기에서 매듭을 맺고 푸는 일의 중요성을 상기시킨다.
지금 우리는 특별히 중요한 전환의 시점에 서 있다. 좁게는 1992년이라는 한 해를 마무리하는 세밑을 지내고 있으며, 넓게는 20세기라는 1백 년의 마무리, 2천년대라는 1천 년의 마감을 앞두고 있다. 그에 걸맞게(?) 올해의 종교계는 유난히도 소동을 겪었다. 그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이른바 「시한부 종말론」이었다. 개신교 일각의 10월 28일 휴거(携擧) 주장은 일과성의 해프닝으로 끝나긴 했으나, 종교의 사회적인 역할과 기능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되짚어보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벌써 많은 이들의 뇌리에서는 희미하게 잊혀져 가고 있긴 하지만, 10월28일 밤에는 휴거설을 내세운 다미선교회 현장을 TV로 생중계까지 할 정도로 사회 전반에 심각한 물의를 일으켰었다.
종말론(eschatology)의 본래 의미대로 최종적인 완성, 역사와 세계의 완결(完世)이라는 희망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막판의 파국을 위협하는 「사이비 종말론」이 설득력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기성종교 자신들에게 가장 큰 책임이 있다. 기성종교의 자성처럼, 첫째는 사회구원보다 개인구복에 치중해온 선교목표 설정의 잘못이 있겠고, 그다음으로는 전환기 간극의 위기에서 사람들을 붙잡아줄 수 있는 대다수가 수긍하는 공유가치의 확립이라는 선교내용의 함량 미달이 큰 문제였다. 10월28일 휴거 불발로 급한 불은 껐다고 안심하는 분들도 있겠으나 잘못된 종말론의 불씨는 여전히 잠복하여 세기말의 불안 심리를 계속 부채질할 전망이다. 새 시대 새 세상을 염원하는 천년왕국운동 따위의 민중종교운동이 세기말이면 어김없이 기승을 부린 종교사의 교훈이 보여주듯이 「사이비 종말론」은 적어도 금세기가 끝날 때까지는 계속 고개를 들 터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간단하다. 그리스도교 교리의 핵심 내용 중 하나인 종말론의 의미를 올바로 가르치고(정교 Orthodoxy) 제대로 실천(정행, Orthopraxis)하는 길이 문제 해결의 요체가 된다. 역사를 낙관하는 종교인 그리스도교는 온 우주, 전 세계가 하느님의 섭리에 따라 종내에는 그분의 거느리심에 도달하는, 완성된 세계가 된다는 가르침을 펴고 있다. 「인간을 총애하는 하느님」(디도 3, 4참조)의 손길은 이미 세계에 미치고 있으며, 인간이 해야 할 일은 하느님의 협력자로서 그분의 뜻에 따라 함께 세상의 완성, 역사의 완결에 동참하는 일이다. 그런데 이 거창한 목표의 달성은 가장 작은 일에서부터 시작되고 있다. 마지막 심판의 척도가 바로 그것이라고 성서는 말한다. 『가장 보잘것없는 이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 25, 40참조). 하느님이 베푸는 총체적 구원, 그야말로 종말론적 구원은 이렇게 내가 나의 구원에만 관심을 두고 매달릴 때가 아니라, 내 주위의 가장 작은이들에게 눈길을 돌릴 때 시발(始發)한다. 이제 1992년도 저물어가는 세밑, 다시 한번 역사의 완성이라는 세말(世末)의 의미를 곱씹으면서 희망 가득 찬 내일을 향한 여장을 꾸릴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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