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구치소 깊은 곳의 세 평 남짓한 상담실에서 사형수들을 만난 적이 있다.
처음 만난 사람은 이 스테파노 형제였다. 그의 가정환경은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편모슬하에서 숱한 고생을 해왔다. 나이가 들자 외항선을 탔고 매달 월급을 집으로 보냈다. 몇 년 후 귀국해 보니 어머니가 죄다 탕진하고 한 푼도 없었다. 사귀던 처녀와 결혼해 잘 살아 보겠다는 꿈이 순식간에 깨졌다. 눈이 뒤집혀졌다. 어머니를 밀친 것이 벽에 머리를 부딪치게 되었다. 결국 존속살인죄라는 거창한 죄명이 붙어버렸다.
두 번째는 김 아우구스띠노 형제였다. 그는 이웃 사람과 사소한 주차 시비에 휘말렸다. 크지 않은 싸움에 저편에서 진단서를 떼 고소를 했다. 진정서도 제출했고 민사소송도 걸었다. 그 사건으로 인해 공무원 사회에서는 거의 치명적이랄 수 있는 징계까지 받게 되었다. 또 보상 요구를 해왔는데 심하다 할 정도의 거액이었단다. 속담에 짐승도 궁지에 몰리면 사람을 문다던가. 그도 끝내 사형수가 되고 만 것이다.
그런데 그는 지난 10월 6일 아침 일찍부터 안절부절못하기 시작했다. 기상나팔 직후 나오던 방송 대신 장송곡(?) 같은 음악이 울려 나왔다. 야외사역, 아침 운동이 없고 통로의 출입이 통제되었다. 낯익은 사형수들이 하나 둘씩 끌려 나가는 것을 직감하게 되었다고 한다.
저녁때가 되어 식사가 나왔는데도 밥을 먹고 싶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그런데 어떤 사형수는 이제 끝났다는 교도관의 말을 듣고 밥을 먹다 말고 형장으로 끌려갔다. 그날 다섯 시간은 「피를 말리는 순간의 연속이었다」고 술회했다.
사형수는 법이 배척하고 사회가 버리고 그 가족들이 외면한다는 얘기가 어제 오늘의 얘기는 아니다. 김 형제가 준 묵주를 만지작거리면서 언덕을 내려오자니 내가 그에게 해줄 수가 있는 것이라곤 약간의 영치금과 기도를 드리는 일 뿐이라는 사실에 마음이 참으로 답답했다.
몇몇 성직자나 신자들만이 호응하는 사형폐지 운동이 아닌, 전 가톨릭 신자들의 관심과 지원이 요구된다는 소리를 우린 귀 담아 들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이 땅에 합법적인 살인 행위라는 사형제도가 영원히 그리고 하루 바삐 폐지되기를 두 손 모아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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