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레, 꼬레 뚜 꾸르(한국, 그냥 한국).” 홍세화 작가가 쓴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에 자주 등장하는 말이다. 저자는 한국에서 왔다는 말에 “노르 우 쉬드?(북한 아니면 남한?)”라고 꼭 되묻는 외국인들에게 이 대답을 고집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민주화운동이 한창이던 때 프랑스에 난민으로 망명해야 했던 그의 고뇌가 묻어나온 답이다.
학생 시절에 이 책을 처음 접했을 땐 책 전체에 흐르는 우수 어린 분위기에 매료됐다. 일류대를 졸업하고 먼 이국땅 프랑스에서 방황하며 조국의 현실을 고민하는 모습을 제멋대로 상상하기도 했다. 필자도 해외에서 외국인들에게 국적에 대한 질문을 받으면 이런 고뇌 끝에 나온 대답을 해야겠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여전히 많은 외국인들은 코리아라는 말을 들으면 남한인지 북한인지를 묻는다.
며칠 전 다녀온 이탈리아 여행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살가운 성격의 한 식당 주인은 주문을 받고는 ‘어디서 왔냐’고 묻고 이내 ‘북한인지 남한인지’를 되물었다. 그런데 이 뻔한 순서의 질문에 필자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 같은 답을 끝내 못했다. 사실 수년째 이런 질문을 받으면 필자는 이내 웃음이 먼저 터지고 재빨리 ‘남한’이라고 답해버린다. 우수에 젖고 고뇌에 찬 답변을 하겠다던 어릴 적 생각은 온데간데없이 말이다.
아마 필자의 실소에는 북한과 비교되는 데 대한 ‘어이없음’이 숨어있는 것 같다. 북한 주민이 어떻게 이렇게 자유롭게 여행을 하고 있겠나. 또 필자의 모습이 흔히 알려진 북한 주민들의 가난한 행색으로 보이냐는 욱한 반발심도 작용하는 것 같다. 혹은 ‘당연히 남한이지’라고 말하면 유머 아닌 유머가 돼 분위기가 밝아지는 경험을 해본 탓도 있다. 어찌 됐건 이런 일을 겪으면 필자의 부족한 소신과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을 인정하게 된다.
이날 오후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 광장에 들어섰을 때 왠지 마음이 무거워졌다. 베드로가 거꾸로 매달렸다는 십자가의 흔적 등 그의 순교를 기린 모습을 눈앞에서 보니 내 가벼움이 너무도 비교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여행 자유가 없는 북한 주민, 외국에서 호기심 거리로 전락한 북한의 이미지 등을 더 고민하고 진심으로 마음 아파해야 하지는 않을까.
그래도 희망이 있다면 베드로도 처음부터 완벽한 모습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성경에는 베드로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난 뒤에도 예수님이 수난을 겪고 부활하리라는 사실을 믿지 못했다고 기록돼 있다. 그런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라고 역정을 내시기도 했다.(마태 16,21-23) 그럼에도 반석이 되리라는 사랑과 믿음을 끝까지 주셔서 베드로를 변화시켰을 것이다.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어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