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2년 대선 때 주변에 1번을 찍었다는 사람은 거의 없었는데, 대통령은 ‘박근혜’가 됐다. 의아했다. 얼마 전 해방둥이 세대인 지인을 만났다. 그분은 평양 태생인데 한국전쟁 때 월남해서 대구에 정착했다. 소위 ‘TK’(대구·경북) 출신인 셈이다. 지난해 말 갑자기 ‘카톡’을 접는다고 공지했다. ‘단톡방’(단체 카톡)을 통해 유포되는 “쓰레기 같은 뉴스”, “말도 안 되는 허황된 이야기”, 억지논리 때문에 분노가 치밀어서 그랬다고 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는 ‘그들만의 리그’가 있다. 온라인상에서는 제한 없는 정보가 쏟아지고 있지만, 듣고 싶은 이야기만 들을 수 있는 세계가 존재한다. SNS 접속을 통해 열려진 세계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깊이 닫힌 그들만의 방에서 검증되지 않은 정보들이 소통되고 확대된다. 여기서는 요즘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출처 불명의 ‘가짜 뉴스’(fake news)가 판을 친다.
이를테면 ‘세월호는 북한의 지령이었다’, ‘JTBC가 보도한 태블릿 PC는 조작됐다’는 등의 뉴스가 그렇다. SNS가 민주주의의 온상이 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민주주의의 심각한 적이 되고 있는 현실이다. 작년 미국 대선을 앞두고 “프란치스코 교황이 차기 대통령으로 트럼프를 지지한다!”는 뉴스가 나돌았다. 멕시코 난민을 막기 위해 장벽을 치겠다는 트럼프를 보고 교황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라 했고, 트럼프는 교황을 보고 개인의 신앙에 의문을 제기하는 ‘수치스러운 종교지도자’라 반발했던 일이 있었기에 더욱 놀라운 뉴스였다. 물론 거짓 보도였다.
가짜 뉴스의 직접적인 피해를 입었던 교황은 한 언론 인터뷰에서 “여론을 한쪽으로 호도하고, 진실의 이면을 무시한다는 점에서 허위 정보야말로 언론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심각한 해악”이라고 했다.
외견상 진짜 뉴스처럼 보이도록 만든 가짜 뉴스의 위험성은 올바르지 못한 메시지가 증폭된다는 데 있다. 온라인 접속으로 ‘동지’가 된 이들은 쉽사리 괴담의 포로가 된다. 같은 생각과 뜻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전해주는 정보이기 때문에 신뢰할만하다고 믿는다. 배타하고 배제하면서 자신들의 신념체계를 공고히 한다. 이를 두고 ‘반향실 효과’(echo chamber effect)라 한다.
‘반향실’이란 끼리끼리 소통하며 왜곡된 관점으로 무장한 독단과 편견의 방이라 하겠다. 이 방에는 관점이 다른 외부 정보는 들어올 틈이 없다. 심리학자들은 반향실에 갇히면 괴담의 진위 여부는 중요하지 않고, 다만 루머의 확대재생산을 통해 소속감을 표현하면서 특정한 그룹에 속했다는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는 데만 몰두한다고 한다.
2000년 전 완고한 유다인들에게 있어 성전은 반향실이었다. 예수 시대 유다인들은 율법과 성전에 갇혀 그들만의 세계를 보고, 그 안에서 그들의 정체성을 확인했다. 하지만 그들만의 반향실, 성전이 서기 70년에 무너졌다. 예루살렘 성전은 유다인들에게는 성소였을지 모르지만, 다양한 신을 인정하던 로마제국의 입장에서는 그저 하나의 신전에 불과했다.
예수께서도 성전을 허물라 하셨다.(요한 2,13-22) 예수께서는 배타적 성전을 대체하면서, 모든 이를 위한 복음을 선포했다. 성전이 무너지자 무엇을 믿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가 중요해졌다. 반향실을 나오자 새로운 비전이 보인 것이다. 성전 안에서만 메아리치던 하느님 말씀이 세상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서로 사랑하라!’는 하느님의 계명을 실천하는 일이 중요해졌다.
초대교회 신자들에게 있어 사랑하라는 계명은 폭압적 지배체제에 저항하고 세상 안에서 공동체를 꾸리는 일이었다. 그리스도교의 사랑이 정치사회적 의미를 갖는 이유이다. 이로써 ‘정의는 사랑의 사회적 형태’가 된다. 그리스도인의 복음은 태생적으로 세상과 연결될 때만 그 진실성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가짜는 증오와 반목을 부추기고, 진짜는 연대와 자비로 인도한다. 그 사실은 오늘 서울 한복판 광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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