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창한 푸른 오월 온누리에 가득한 주님의 향기를 만끽 하면서 나는 기도드립니다. 『천주여 나를 사랑으로 내시고 나에게 영혼육신을 주시어 다만 주를 원하고 사람을 도우라 하시었나이다. 내 비록 죄가 많사오나 주께 비친 몸과 마음을 오롯이 도로 바쳐 찬미와 봉사의 제물로 드리오니 어여삐 여기시어 받아들이소서』
우리집안은 조상대대로 불교를 숭상하던 철저한 불교집안이었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무당이였습니다. 해마다 정월이면 일년신수와 길흉을 점치러 많은 사람이 우리집을 찾아오고 문전성시를 이루었습니다. 우리 남매는 어머니가 신기하게 알아 맞추고 온갖 푸닥거리 처방을 내리는 것을 보며 살아 왔습니다. 나는 우리 어머니가 언제 어떻게 무당이 됐는지를 지금도 생생히 기억합니다. 6ㆍ25사변이 일어나던 해 나는 일곱살이었고 우리 형님은 대건중학교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우리 형제는 공기총을 메고 대건학교에 참새 잡으러 종종 가곤 했습니다. 그때 대건학교 뒤에는 나무가 우거져 있었고 참새가 무척 많았습니다. 참새도 잡고 성모당에도 구경갔습니다. 흰수건을 쓴 여인들이 굴앞에서 기도하는 것을 보았고 굴앞의 성모님은 하늘의 천사로 알았고 무언지 모를 성스러운 기운에 내 마음은 불풀었습니다. 그로부터 실로 40년후 내가 영세를 하고 성모당을 다시 찾은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우리 형님은 학도병으로 군에 지원해 가셨습니다.
그날부터 우리어머니는 매일 장독대에 물을 더놓고 형님이 무사하기를 천지신명께 빌었습니다. 그즈음 대구역에는 부상병과 전사자들이 매일 실려왔습니다. 어머니는 마음에 접히는 일이라도 있는지 거의 반 미치광이가 되어 부상병들과 시체들을 누비며 형님의 소식을 애타게 기다리며 초조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번 간 형님의 소식은 깜깜하기만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새벽 어머니가 급하게 나를 깨우는 바람에 벌떡 일어나니 아직 깨지않으신 우리 아버지가 꿈을 꾸면서 흐느끼고 있었습니다. 내가 깨우려하니 어머니는 말리시면서 기다리자고 했습니다. 한참을 더 울고나신 아버지는 잠을 깨시면서 형님의 이름을 슬피 부르짖는 것이었습니다. 꿈속에서 형님을 만나 끌어안고 울었노라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어머니는 경련을 일으키고 얼굴이 이상하게 변하며 형님의 영이 덮혀 부르짖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 경덕이가 왔습니다』『엄마 내가 왔다』『내 동생아 잘있었느냐』정말 형님이 와서 이야기 하듯이 온갖 이야기를 다 하였습니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