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님은 왜관전투에서 아버지를 부르며 죽었다고 말했고 춥고 배도 고프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족은 모두 통곡했고 나는 어머니의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너무나 무서워 벌벌떨었습니다. 잠시후 어머니는 정신을 차렸고 그때서야 우리는 형님이 돌아가신줄 알았고 형님의 옷과 구두 일체를 마당에다 내어 태웠습니다. 그날 이후 어머니는 신이 들었습니다. 우리가족들은 정말 어쩔줄을 모르고 심한 갈등속에 집안은 엉망이 되어 버렸습니다.
어머니는 실성한 사람이 되어 온갖 것을 다 알아맞추니 동네사람들은 소문 듣고 찾아와서 온갖 것을 물으면 어머니는 신기하게도 잘 맞추었습니다. 일자무식인 우리 어머니는 온 천지의 귀신이름을 다 알았고 귀신이름만 한시간도 넘게 외우고 배우지도 않은 염불도 그렇게 잘나오고 온갖 사설이 입에서 줄줄 나왔습니다.
그때부터 우리 어머니는 남산동에서 용하다는 무당이 되었고 모시(성이 모시)보살로 통했습니다. 나는 이 일로 인하여 어릴때부터 영혼의 세계가 있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어머니는 그후 40년동안 무당으로서 온갖 미신을 다 섬기며 살았고 우리는 덩달아 미신을 섬기는 가족이 되었습니다.
해마다 정월이면 집안ㆍ안택과 명기를 더하는 굿을 하여 온동네에 북새통을 만들고 하잖은 감기도 굿을 해야 낫는 것으로 아셨습니다. 남의 상가에도 가지못하게 하고 항시 부적을 몸에 지니고 다니게 했습니다. 우리집 대문에는 항상 푸른 대나무가 꽂혀 있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교사가 되었습니다. 선생님 집이라고 학생들이라도 찾아오는 날이면 나는 그 대나무가 마음에 걸렸습니다. 학교에서 미신을 타파하라 하면서 선생님 집에는 신대가 꽂혀있으니 체면 문제고 동료들이 놀러와도 늘 불안하고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신대를 없애버리자 하면 어머니는 호통을 치면서 그런 말을 입에 담는것조차 불경스럽게 생각하여 무지한 중생이 몰라서 하는 소리니 너그러이 용서해달라고 당신의 신에게 또 빌었습니다. 여러가지 생각끝에 우리는 수성동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절대 당신의 신을 배척할수 없으니 너희들이나 가라고 극구 반대하므로 어머니의 고집과 성격을 잘아는 우리는 일단 이사하고 나는 이쪽 저쪽을 왔다갔다 하면서 두집 살림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머니는 연세가 많아져서 점도 칠수 없게 되었고 질녀와 아내가 번갈아 가며 조석을 돌봐드리지만 아무래도 불안하며 반강제적으로 수성동 집에서 같이 살라하고 모셔왔습니다. 어머니는 놀이터에서 노인들과 앉아 아들의 체면도 아랑곳없이 옛날의 명석했던 무당 시절의 온갖일들을 자랑삼아 늘어 놓으면 오뉴월 하루낮도 짧게만 여겨졌습니다. 건강하게 다니시면서 소일하시는것이 나에게는 그래도 큰 위안이 되었습니다.
그즈음 여동생이 회관을 경영하고 있었는데 어쩌다가 놀러가면 『오빠 난 오빠가 오는줄 알고있었어요』 『네가 어찌 내 오는 것을 안단 말이냐』 『오빠 내 오른쪽 눈썹이 팔랑거리면 틀림없이 오빠가 옵디다』나는 이말을 듣고 기분이 싹 잡쳐서 어머니께 떠난 귀신들이 동생에 가는구나 하고 생각하니 너무나 끔찍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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