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처럼 겨울비가 촉촉히 오는 날. 고요한 수녀원 뜨락을 천천히 걸어본다. 아! 그동안 못보았던 나무들이 나를 기다린듯 해서 반갑게 인사를 한다. 「찬미예수! 소나무, 호도나무, 후박나무, 오동나무, 그리고 산수유…」모두들 추위를 잘 견뎌내고 있다. 나무들의 대림절 기간인가, 봄이 오기를 기다리는 그들의 모습은 인간과는 달리 무척 여유있어 보인다.
옷을 벗고도 당당한 나무, 인간도 다 벗고서 저렇게 부끄럼없이 당당할 수 있을까? 모두 키가 너무 커서 내 얼굴과 마주할 수 있는 보기편한 산수유나무앞에 서 본다. 그런데 나뭇가지마다 비를 먹고 망울이 부풀었다. 어쩌려고 저럴까? 아직도 겨울은 먼데, 겨울 한 복판에서 불쑥 솟구친 저 여린 꽃망울이 찬바람이 오면 어찌할꺼나, 사람의 실핏줄처럼 가늘게 이리 저리 뻗었는데도 서로 의좋게 자기가 숨쉴 곳곳으로 뻗은 가지들, 한없이 자유롭게 당당하다.
나는 사람도 당당한 모습이 좋다. 당당한만큼 성실하고 정직하니까. 당당함이란 꾸며서는 나오지 못하는 모습이 아닌가. 어느날 문득 쭉쭉 뻗은 겨울나무가지를 쳐다 보면서 잎새없이 몸만 내논 그들 모습이 꼭 하늘 아래서 고해성사를 보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푸른 잎 붉은 잎이 다지고 난뒤 한해 다시 더 좋은 잎을 피우기 위해 지난해 자신의 부주의나 게으름으로 피우지 못한 잎을 사죄 받는듯 해서 겨울이 필요하구나 하였다.
겨울이 가면 반드시 봄은 온다. 그래서 한겨울에 봄을 볼 수 있고 인간들도 아픔이 가장 심할 때 오히려 더 큰 희망을 보는 것이 아닐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언제나 용기를 얻듯, 겨울바람이 씨잉 지나간다. 산수유 나뭇가지가 순간적으로 부르르 떤다. 그러나 이내 자기 위치로 돌아가고 늠름하다.
추위가 심할수록 그리고 그 추위를 견뎌낸 나무일수록 좋은 꽃과 열매를 맺듯 인간들도 고토이 더할때 오히려 내실을 다지는 때로 살아야 하지 않을까? 산수유나무를 지나 성모상앞에 가니 장미꽃 봉오리가 제법 도톰하게 맺혀있다. 누구를 기다리길래 그새 못참고 저리 나올까. 이 겨울에, 약간의 추위에도 어깨를 움추린 나의 비굴한 모습을 책하기라도 하듯 겨울뜨락의 빈가지 나무들은 오늘도 찬바람 씽씽 불어오는 북쪽을 향해 더욱 튼튼히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이번호부터는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대구관구 문화순(오틸리아) 수녀님께서 집필해 주시겠습니다. 그동안 수고해 주신 구재회씨께 감사드립니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