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은 참 빠른 민족성을 지닌 듯하다. 한국사회는 정말이지 변화무쌍한 빠른 사회다. 자고 일어나면 무엇이 뚝딱 생기고 없어지고 한다. 알던 길도 한 달만 지나면 찾기가 난감하다. 모든 것이 너무 빨라서 정신이 없다. 한국에서 유일하게 망하지 않는 사업으로 택배사업을 든다고 한다. 이를 두고 ‘배달의 민족’이라고 우스개로 말하기도 하지만 실상은 속도를 즐기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어디서건 빠른 배달이 가능하기에 주문을 즐기고, 주문이 폭주하는 것이다. 사실 외국엘 나가보면 금방 느껴지는 것이 느릿한 속도가 주는 답답함일 것이다. 인터넷 뉴스도 답답하고 은행창구도 답답하긴 마찬가지다. 지금 이 글을 쓰는 내 자신도 손길이 빨라지는 것을 보니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이다.
생각해보면, 빠르다는 것은 꼭 좋다고도 나쁘다고도 할 수 없지만, 분명한 장점과 단점을 지니고 있다. 한국이 IT와 모바일 강국이 된 것을 보면 그 장점일 것이지만, 황우석 사태와 삼풍백화점 붕괴를 보면 그 단점도 분명히 보인다. 한국을 일컬어 초고속으로 성장한 세계 11위 ‘경제대국’(전혀 와 닿지 않는 표현이지만)이라면 장점이라고 볼 수 있지만, 그 이면에 자리한 노동자들의 희생과 결과물의 부실함을 생각한다면 명백한 약점이 아닐 수 없다. 폭탄주를 ‘원샷’하는 것이 취기를 급상승시키는 더없는 방법도 되지만, 그런데 ‘건강과 가족은?’이라고 물으면 답이 궁색해진다. 총알택시가 시간을 벌게도 하지만 목숨을 잃게도 한다. 아, 우리는 왜 이토록 속도전에 매달려야 할까….
다시 생각해보면, 빠르다는 것은 속도전이 필요한 스포츠용어에 걸맞지만, 일상용어로는 필요조건이 될망정 충분조건이 아니라는 생각에서 왠지 꺼림칙하다. 분명한 것은 아무리 빠른 것이 좋더라도 임기응변에 그쳐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순발력을 탓하거나 융통성을 나무랄 것은 아니지만, 그것만을 일삼는 것이라면 문제일 수 있다. 왜냐하면 순간만을 모면하려는 약삭빠른 태도는 서로를 민망하게 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별 탈이 없을 때야 빨리한다고 나쁠 것이 없겠지만, 무엇이건 그렇게 조장할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학교에 있다 보면 어쩔 수 없이 학생들에게 핀잔을 줄 때가 있는데, 그중의 하나가 잘못된 시간활용에 관한 것이다. 가령 학생들이 ‘초치기’에만 매달리는 것을 나무랄 때가 있다. 그것이 문제인 이유는 당장의 암기가 결코 지식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또다시 생각해 본다. 빠르다는 것이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이지만, 최소한의 원칙마저 무너뜨린다면 분명히 좋은 것이 아닐 것이다. 여기서 공동체, 곧 한국사회를 떠올려보아도 좋다. 요령만을 주장하는 공동체는 뭔가 허술할 수밖에 없다. 요령에 앞서서 원칙을 세우고 조금 늦더라도 정도(正道)를 가르치는 공동체가 건강하게 살 수 있다. 우리 모두가 바라는 사회는 일등사회나 최고사회가 아니라 멋진 사회일 것이다. 누구도 소외시키지 않는 그래서 아무나 이웃이 되는 공동체가 멋진 공동체일 것이다. 그런 멋진 공동체에서는 한 가지만 신경 쓰면 된다. 자기만 살겠다는 탐욕형 사람을 걸러내고, 내가 최고라는 막무가내형 사람을 불러서 ‘따로’ 인격 연마할 시간을 주면 되는 것이다. 더 필요할 것도 채워야 할 것도 없다.
그렇다고 무조건 느림을 예찬하는 것도 문제가 된다. 너무 느리면 상대방에게 결례를 범하기 쉽고, 비록 가족이라도 오해를 살 수 있으며, 느릿느릿 하는 것 자체가 직장상사에게 좋게 보일 리 없다. 어느 것 하나에 매달리지 않고, 조화를 이루도록 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아무리 좋은 것도 따로 두면 쓸쓸하고 외로우니까. 그래서 ‘함께’와 ‘조화’를 의식적으로 배운다면 해결방안이 되리라고 믿는다. 가령 ‘빨리빨리’와 ‘야무지게’도 따로 두지 말고 함께 하도록 그래서 조화를 이루도록 한다면 정말 괜찮아질 것이다. ‘민첩하게’와 ‘신중하게’를 그렇게 함께 두면 확실히 더 나은 결과를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 외부 필진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