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에 의해 대통령으로 부름을 받은 사람이 그 직분을 올바로 수행하지 못해 탄핵심판을 받는 불행한 시대를 살아가면서, 소명과 사명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본다.
사람은 부름에 응답하는 존재다. 부름은 관계의 확인이며 사회적 존재로 나아가도록 하는 요청이다. 이러한 부름은 한 개인의 부름, 사회의 부름, 신의 부름으로 나눌 수 있다. 이에 따른 응답도 각기 차원을 달리하게 된다. 위로부터의 부름을 소명이라고 한다면 세상을 향한 행위의 응답은 사명이라고 할 수 있다. 소명과 사명 사이에 주체가 되는 내가 있다. 소명은 직업이나 직분으로 번역돼 쓰이기도 한다. 그리고 사명은 그 직분에 따른 과업을 말하기도 한다. 현대사회에서는 사회적 소명인 직업이 강조되고, 거룩한 부름으로서의 소명은 종교적으로 제한해 사용되고 있다. 사명 역시 사회적 관점에서 구체적인 과업을 실천하는 일로 한정해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소명과 사명은 개인과 사회와 종교를 포괄하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이름을 부름은 이름에 담긴 의미에 부응하는 이상적 인격에 대한 기대를 담고 있다. 직분을 말함에 있어서도 직분을 부여받은 자는 이에 부응하는 태도를 일관되게 지켜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따라서 옛 선비들은 공적인 삶에 있어서뿐만이 아니라 사적인 생활에 있어서도 직분에 맞는 수행적 태도를 갖추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사람의 인품은 일을 통해 나타나고 인간관계 안에서 확인되기 때문이었다. 실로 불의한 일은 작금의 사태에서 보듯 후일 반드시 드러나며 인간관계를 파괴하고 사회에 폐해를 끼치기 마련이다. 따라서 조정의 부름과 이에 합당한 직분을 수행하는 선비의 본분은 의로움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는 절체절명의 순간을 마주하는 일과 다름이 없었다.
한 개인에 대한 부름은 그가 누구인지 정체성을 일깨우고, 사회의 부름은 사회적 삶의 가치를 깨닫게 하며, 신의 부름은 완전한 삶을 지향하게 한다. 이렇게 본다면 세 차원의 부름은 다른 것이 아니라 연속된 하나의 부름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에 응답하는 사명도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응답이다.
이러한 하나의 부름과 하나의 응답을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아담을 부르시고,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사울을 부르신다. 이 부름은 한 개인에 대한 정체성의 부름으로부터 새로운 사명을 부여받은 새 사람으로 공동체 안에 그의 정체성을 확인하게 한다.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고 세상을 일구고 새 생명을 낳는 하느님의 사람이 되고,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믿음으로써 모든 민족의 아버지가 되며,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던 사울은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전하는 바오로 사도가 된다. 실로 바오로 사도는 로마인들에게 보낸 서간 첫머리에서 스스로를 “그리스도 예수님의 종으로서 사도로 부르심을 받고 하느님의 복음을 위하여 선택받은 바오로”라고 지칭하며 자신의 소명과 사명을 명료하게 밝히고 있다.
이렇게 소명과 사명에 내재된 의미를 되새겨 본다면 우리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일과 관련해 세 가지 점을 심사숙고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하는 일이 하느님께서 각자에게 고유하게 부여하신 일인지, 세상 사람을 위하는 일인지, 하느님의 진리를 구현하는 일인지. 만일 우리의 삶이 이 세 가지 점을 충족시킨다면 우리가 하는 일이 어떤 일이든지 소명에 따른 사명이 아닐 수 없다. 이 세 가지 관점에서 세상의 일을 바라본다면 사람이 종사하는 모든 일은 거룩하다. 생산에 종사하는 노동, 생활세계를 창조하는 작업, 사회적 참여를 통해 삶을 풍요롭게 하는 활동 모두 거룩하다. 모두 사람과 직간접으로 관계하고 도모하는 가운데 하느님의 말씀을 이루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적폐를 청산하고 새로운 삶의 자리를 꾸려나가야 하는 중대한 과제 앞에 서 있다. 내적으로 우리 각자가 어떤 소명과 사명을 받고 있는지 되돌아보아야 할 시기다. 하느님의 부르심은 희미하지만 분명하고, 우리의 응답은 미약하지만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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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향만(베드로) 가톨릭대 의대 인문사회의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