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서품을 받고 보좌신부 생활을 하다가 군종신부로 파견되어 서울 외 지역에서 사목을 한 시기가 있었다. 신학생 시기에 다른 교구 신학생들과의 교류는 드물었고 사제서품을 받고 나서야 타 교구 사제들과 좀 더 가까워지면서 출신 학교와 교구에 따라 신부들도 조금씩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태어나서 자라고 배우며 성장한 환경이 제각기 다르기에 사제로서 살아가는 방식과 태도가 다를 수밖에 없음은 자명한 일이지만, 바라보고 걸어가는 방향마저 다른 것 같은 의아함에 깊은 고민을 해본 적이 있다. 타 교구 사제들과의 다름만이 아니라 같은 교구 사제들 사이에서도 출신 학교가 같음에도 생명과 환경, 세상과 사회를 바라보는 눈길과 다가서는 방식이 첨예하게 달랐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고 그 삶을 살고자 일련의 교육과정을 동일하게 거쳐 양성된 사제가 분명한데 사람, 노동, 정치, 국가 등에 대한 관점이 달랐고, 심하게는 복음과 교회에 대한 견해에도 극단적인 차이가 나는 경우가 있었다. 다름을 받아들이는 데 많은 시간이 걸렸고 여전히 그 다름에 마음 아픈 일이 종종 생긴다.
우리나라에는 사제를 양성하는 신학대학교가 7곳이 있다. 2015년 한국천주교회 통계에 따르면 2015년 12월 31일 현재 성직자의 숫자는 수도회사제를 포함하여 5091명이다. 전국에는 1706곳의 본당과 761곳의 공소가 있고 신자는 565만 명이다. 인구대비 10.7%까지 육박하는 숫자다. 우스갯소리지만, 바다가 짠맛을 내는 것은 3.1%의 염분 농도 때문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우리나라는 천주교 신자들의 비율만으로도 하느님 나라의 맛을 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잔인하다 싶을 만큼 아프다. 5000여 명의 사제가 다른 생각과 가치를 가지고 있어서 그런지 신자들도 다른 생각과 가치를 외치고 주장한다. 국정농단이라는 초유의 사태로 비롯된 대통령 탄핵에 대한 찬반으로 국민들이 분열된 만큼 교회의 구성원들도 제각기 다른 목소리로 혼란을 만들어 내고 있다. 태극기와 촛불로 대변되는 시위가 동일한 장소에서 이루어지던 날에 몇몇 사제들과 신자들은 복음과 사회교리의 가르침은 찾아볼 수 없는 자신의 생각과 가치를 대변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국민과 국론을 혼란과 분열로 이끈 악한 세력들에게 분노하면서도 교회는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인 곳이니 받아들여야 한다고 체념하고 하느님의 정의와 진실을 찾아야 하는 복음의 명을 손 놓아 버리기도 한다. 사제들 생각이 천차만별이니 신자들의 의식이 다른 것은 당연한 것 아니냐는 말은 더욱 가슴을 답답하게 만든다.
가톨릭이란 말은 교회의 특징이 구원의 보편성에 있음을 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현실을 보면서 시대의 징표를 읽고 예언자적 말씀을 선포하는 데 있어 한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것은 구성원들의 관심이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다. 주교님을 위시해서 사제들, 수도자들, 신자들이 복음에서 보여준 예수 그리스도의 눈길과 다르게 자기 안위만을 신경 쓰는 폐쇄적인 관심 때문에 하나의 외침을 가지지 못한다.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가까이 다가가서 보고 알게 되는 것이며 아는 만큼 투신하여 살아가게 만드는 것이다.
교종의 말처럼 교회 안에서만 웅크리고 있을 것이 아니라 문밖으로 나가 고통에 울부짖는 소리를 찾아 다가가고 그들의 울음에 귀 기울이며 관심을 가질 때 두렵고 떨리지만 혼란의 세상에 교회는 예언자의 목소리로 외칠 수 있다. 5000여 명의 사제와 560만 명의 신자들 서로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말아야 할 명백한 교회의 역할은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했던 예수 그리스도처럼 하느님의 나라와 의로우신 하느님의 다스림을 이 혼탁한 어둠의 나라에 외쳐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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