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 지난 3월 10일, 헌정사상 첫 대통령 파면 선고가 내려졌다. 그것도 헌재 재판관 전원일치의 판결이었다. 이제 정말 봄이 왔나 싶다.
지난주 ‘방주의 창’ 원고 마감일을 넘겼다. 3월 10일, 탄핵심판 결과를 보고 원고를 전하겠노라고 데스크에 양해를 구했다. 마침 주교회의에서도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화해와 일치의 자세로 수용”하자며 대국민 호소문을 선고일 전날에 내놓았다. “정의의 기반을 뒤흔드는 일들”과 “선고 이후 예상되는 민심 분열과 혼란”을 우려하는 천주교회의 목소리였다. 주교회의 의장 김희중 대주교는 “긴급한 회개를 선포하는 예언자 요나의 마음으로” 호소한다고 했다. 탄핵선고 당일 점심시간을 이용해 헌재 앞에 탄핵반대 집회 현장으로 갔다. 종로3가 단성사를 돌 때 태극기를 든 일단의 무리가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집회가 마무리된 줄 알았다. 하지만 고성능 스피커가 종로통을 울리고 있어서, 계속 걸었다. 헌재 앞 경찰 차벽 앞으로 다가갈수록 내 얼굴의 웃음기는 조금씩 지워지고 있었다. 태극기를 든 이들 앞에서 더 이상 미소를 띨 수 없었다. 그들의 분노와 욕설이 험악했고, 응급차에 실려 가는 이들도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이성의 공간이 아니었다. 다음날 촛불집회에 참석했다. 벌써 20차였다. 지난 겨울 초기 촛불집회 때는 분노와 ‘자괴감’이 있었지만, 지금 광화문에 서면 눈물이 난다. 시민들의 인내와 연대, 그리고 준엄하면서도 발랄한 시민들 때문이다. 기쁨의 함성은 광장을 메웠고, 폭죽이 밤하늘을 수놓자 광화문 너머 청와대는 깊은 어둠에 묻혔다. 마침내 기한을 넘긴 원고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청와대 퇴거까지 보고서야 마무리했다.
국민통합 요구가 거세지만, 파면된 대통령은 삼성동 집으로 들어가면서 대변인을 통해 “진실은 밝혀질 것”이라며 탄핵인용에 사실상 불복했다. 헌재 최종결정이 그에게는 분열의 끝이 아니라, 더 깊은 분열을 조장하는 갈등의 새로운 시작으로 보인다. 이런 박근혜 전 대통령을 두고 “죄의식 없는 확신범”이라 했던 어느 국회의원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한 정신과 전문의는 그에게서 ‘리플리증후군’ 증상이 보인다고 했다.
리플리증후군은 현실을 부정하고 허구의 세계만을 믿으며 상습적으로 거짓말을 하고 행동하는 반사회적 인격장애를 일컫는 말이다. 이 증후는 사회적으로 심각한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자신의 상습적인 거짓말을 진실로 믿고 거짓 자아를 통해 본인은 마음의 평화를 얻게 할지는 모르지만, 정작 그 거짓말은 확대재생산돼 타인에게 심각한 피해를 입힐 위험이 높기 때문이다. 박사모 집회의 폭력성과 가짜뉴스의 유포에서 그 위험성이 보인다.
‘박근혜의 청와대’는 간신배와 모리배가 겹겹이 둘러싼 인의 장막이었다. 일례로 2013년 춘추관 송년회 자리에서 비서실장 김기춘은 “우리 대통령은 디그니티(위엄)있고, 엘레강스(우아)하고 차밍하다. 박정희 대통령처럼 강단도 있다”고 했다. 인의 장막은 거짓 자아를 더 키웠고, 대통령은 소통부재와 비선 속에서 길을 보려 하지 않았고 마침내 길을 완전히 잃었다.
신약이든 구약이든 성경에서 죄를 짓는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하느님의 길(올바른 길)에서 벗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느 권력이든 좌표상실은 몰락이고 재앙이었다. 죄를 나타내는 가장 기본적이고 가장 많이 쓰인 히브리어 ‘하타’가 있다. 올바른 길에서 벗어났다 또는 표적에서 벗어났다는 의미이다. 이번 국정농단사태를 통해 광장의 시민은 자신 안의 ‘박근혜’와 ‘이명박’을 고백했고, 새로운 공동체를 꾸려 다시 길을 잡아 떠나려 한다. 마침 사순 시기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선덕화라는 법명도 있다지만 율리안나라는 세례명도 있다고 한다. 이제 사인으로 돌아왔으니 모처럼 종교심을 발휘해 생각을 바꿔 올바른 길로 다시 돌아오는 ‘회심’을 기대한다. 길을 잃은 지 오래되었더라도 자신이 걸어온 길을 되짚다 보면 어디서 길을 잃었는지 찾을 수 있다. 비록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그 길에 서야 타인의 피해를 최소화하지 않을까. 사순 시기, 참으로 참회하고 속죄하기 좋은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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