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이맘때쯤 필리핀에서의 유학을 마치고 귀국할 즈음에 내 나름대로의 생활신조에 젖어 있었다. 나의 생활신조란 사제로서 뿐만아니라 상담자로서 해야할 사목활동에 있어 무엇보다 대면하게 되는 신자들간의 만남 안에 「검은 피부 하얀 마음」의 지혜를 터득하는 것이었다.
「검은 피부 하얀 마음」이것은 미사여구의 시적묘사가 아니라 종교적인 삶안에 진정한 만남의 의미를 체험하는 그리스인도의 지혜를 말한다.
이 문구를 나의 생활신조로 갖게된 계기는 필리핀 유학중 어느날의 학과 야유회때였다. 마침 야외소풍을 나가는 날에 나와 같이 공부하던 한국 자매님은 3살먹은 딸애를 데리고 왔었다. 3살의 여자아이, 생각만해도 귀엽고 깜찍스러운 예쁜 모습이었다. 모두가 이 아이가 이쁘고 사랑스럽다고 하면서 좋아하는 표현으로 제각기 프로포즈를 취하기도 했다.
특히 그중에서도 인도에서 오신 신부 한분이 제일 그 아이를 좋아 하였다. 버스를 타고 가는 도중에도 시종 이 신부님은 이 아이 가까이에 앉아 말을 걸기도 하고 좋아하는 표시로 이 아이를 한번 안아 볼려고 하자 여자 아이는 그만 질겁을 하였다. 낯설은 사람의 포옹태세에 꼬마 아가씨가 질겁을 하고 물러서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지만 뜻하지 않은 해프닝에 나는 그 아이에게 왜 그러느냐고 물어보았다.
여자 아이의 말인즉, 『이 아저씨는 더러워』세수도 하지않고 때가 꼬질꼬질 끼어서 시커멓고 더럽다는 것이었다. 정말 놀라운 어린아이의 반응이었다. 그래서 그 아이에게 이 신부님은 아침세수를 하지않아 때가 끼고 더러운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피부가 까맣기 때문에 그렇다고 설명했지만 아이에겐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 머리를 스치며 지나가는 놀라운 발견은 이 순간이었다. 한 인간을 보는데 있어서 비록 형상적으로 나타난 그 신부님의 까만 피부가 소아기적인 자의식에는 더럽게 보일지 모르지만 성숙한 어른으로서의 자의식은 까만피부 이면에 감추어져 있는 한 사제의 순결함과 고귀함을 체험할 수 있기에 「검은 피부 하얀 마음」의 지혜를 헤아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필리핀 생활 6년만에 터득한 나의 생활신조를 바탕으로 하여 새로운 사목생활에 임한지도 벌써1년, 세월의 흐름을 막을수도 없듯이 많은 시간들은 어김없이 우리곁을 스쳐갔지만 「검은 피부 하얀 마음」의 지혜속에 얽힌 흔적들은 아직도 내마음을 가득 메우기도하고 미래의 사목지향에 확고한 디딤돌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좋은 흔적들은 세월이 갈수록 윤이 나고 고귀한 값어치로 삶의 밑거름이 되지만 나쁜 흔적들은 날이 갈수록 상처가 되고 추악한 악몽으로 남는다.
한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한지도 벌서 많은 날들이 흘러간 이 시점이지만 아직도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를 모르는 추악한 악몽에 시달리는 나쁜 흔적 하나가 있다.
지난 가을 어느날 내가 맡고있는 농아선교회에 리찌(RICCI)패션이라는 의류판매점에서 바자 신청이 들어왔다. 「농아선교회 회관건립」이라는 제하에 이 의류점은 바자를 열었다. 때마침 판매원들의 무단이탈로 농아 봉사자들이 판매까지 해야하는 수고마저 아끼지 않았다. 바자는 성대히 끝났고 제법 큰 액수의 어음을 농아선교회 회관건립기금으로 내놓았다. 농아자들은 거액의 어음을 받았다는 기쁨도 있었지만 이것이 밑거름이 되어 멀지 않아 기금확보를 통한 회관건립에 박차를 가할 수 있다는 설레이는 희망에 뿌듯한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다. 그런데 이건 웬 일인가? 어음 만기일이 되어 은행에 입금시킬려고 했더니, 어음부도라는 냉냉한 소리만 메아리치지 않는가? 참으로 기가 막혀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니,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땟놈이 가진다는 말은 들었어도 재주는 벙어리가 부리고 현찰은 사기꾼(신자)이 챙겼단 말인가. 말못하는 벙어리들을 앞장세워 그들을 미끼로 현찰과 함께 바람같이 사라져 버렸다는 이 신자양반을 놓고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신자가 신부에게 사기치는것쯤은 용서라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그렇다고 치자, 중요한 사실은 세상의 혼탁함과 가치관의 혼란이 교회 안에서도 이렇게 무방비 상태로 물들어 있다는 사실이다.
신앙생활과 사회생활을 하나로 밀착시키지 못하고 눈앞의 속물적인 가치에 하느님도 팔수 있고 교회 사제에게도 사기칠 수 있고, 선의의 많은 많은 사람들에게 아픈 상처를 남길 수 있는 가라지와 같은 신자들이 교회안에 서서히 뿌리박고 있다는 이 현실에 나는 사목자로서의 생활신조에 혼란을 일으키지 않을 수가 없다.
무엇이 이토록 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가? 그것은 아마 우리 교회가 그리스도적 성숙과 영신적 깊이 안에 신자 증가율을 이루지 않은 선교 영성의 부조리 현상에서 온 것이 아닌가 한다.
잘 모르긴해도, 우리가 해야할 선교의 삶은 오늘의 시대가 물질주의로 굳어져 있고, 경제제일주의로 가득차 있는 현대인들에게 우리 교회가 종교적인 의미에서 현대인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또 종교적인 삶에서 누려야하는 인간의 전부가 과연 무엇을 깨닫게 하는지를 생각케하고 하느님의 기준에서 인간의 삶의 의미를 깨닫게 해주는데 있다.
이것이 오늘 이시대가 요구하는 교회의 사회적 역할일 것이고 「하얀피부 검은 마음」의 가라지를 제거해 주는 선교 영성일 것이다.
「검은피부 하얀마음」의 지혜를 터득하려고 하는 나의 생활신조는 비록 자신의 결함과 허물에서 벗어날 수 없는 물리적인 한계 안에 갇혀 있지만 자신의 결함을 자각하고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자신의 창조적 잠재력을 개발해 나가려는 노력과 마음을 통하여 인간 상호간의 협력관계를 이룸으로써,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모상을 따라」이라는 단 하나의 같은 목적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모습이 가장 아름답고 허심탄회한 인간 본래의 모습이기에 나는 방주의 창을 통하여 첫번째의 메시지를 날려 보고 싶다.
『착한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하늘이 복으로써 갚고, 악한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하늘이 재앙으로써 갚으니 선할 일을 보거든 목마른 것 같이하고, 악한 일을 보거든 귀머거리 같이 하라』(명심보감중 계선편에서)
지금까지 수고해주신 이강언 신부ㆍ박인환씨ㆍ이종석씨ㆍ최공엽씨께 감사드립니다. 이번호부터는 조옥진 신부(부산교구 사목국장) 장승재씨(포항 MBC편성국장) 허종진씨(한글학회회원) 최덕기 신부(수원교구 사목국장)님께서 수고해 주시겠습니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