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오고 있다. 세월은 돌아 다시 장 담그는 철이다. 그러나 외할머니와 어머니와 나로 이어졌던 끈이 내 딸로 연결되면서 외할머니는 사라지고 어머니도 육신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으로 떠나셨다. 나는 외할머니를 옷감으로 추억한다. 물자가 귀하던 시절 딸이 많은 어머니가 사 모으신 양단, 모본단, 명주, 은조사항라 등을 외할머니는 일년에 몇번씩 꺼내서 거풍을 하셨고 결혼할때쯤 손녀딸의 발 크기를 예감하여 조각낸 광목으로 버선을 만들어 놓으셨다.
어머니는 나에게 맛으로 함축된다. 인간생활의 기본조건인 의식주란 개념에서 옷이 음식보다 앞인 것에 나는 늘 의구심을 갖는다. 갓난애적 젖맛을 기억하는것은 아니지만 모든 사람에게 어머니는 맛으로 남을 것이다. 맛이란 모든 감각을 총 동원하는 요인이다. 냄새, 모양, 색깔, 감촉이 있고 계절, 지역, 나이가 있다. 그리고 거기엔 사랑이 있다 외국생활을 할 때 그리운 고향도 결국 집에서 먹던 음식에서 대한 향수이며 그것은 곧 어머니의 손맛과 동일하다. 결혼생황에서도 고향이 동떨어지면 음식맛이 이질적이라 모든 것을 맞추기가 힘들다.『한국음식의 특징은 어디 있죠?』하는 외국인에게 나는 양념에 있다고 대답하고 곰곰이 생각하니 간에 있는 것 같았다. 간이란 일차적으로 간장, 된장, 고추장의 발효된 짠맛이지만 온갖 재료와 양념으로 복잡하게 만든 음식을 마지막으로 점검하는 절차를「간을 본다」고한다면, 간은 그렇게 단순한 짠맛만은 아니다. 우리는 음식 하나 하나의 독특한 맛을 제대로 살렸을때 간이 잘 맞는 다고 한다.
서울에서만 살아온 나는 고향이란 말에 늘 갈증을 느껴 애들에겐 고향의 이미지를 심어주려고 산이 보이는 곳에 예쁜 집을 지어 오래 살았다. 그러나 근처에 있는 대학 때문에 최루탄에 시달려 한강을 넘어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묵은 짐을 정리하며 나는 여러번 눈물을 삼켰다. 크고 작은 항아리, 돌절구, 광주리, 하다못해 짠지를 눌러 놓았던 돌맹이에 이르기까지 음식과 관련된 모든 것엔 어머니의 손때가 있었다. 대물림을 한 골동품이 아니라서 더욱 마음 아팠다면 아이러니일까? 며느리에게 살림을 내놓는 뒤 신제품에 밀려 하나씩 없어진 당신의 살림살이를 딸네에 사놓고 허전함을 달래셨던 어머니. 인부의 눈총을 받으며 나는 돌절구, 항아리를 끌고 왔다.
십년, 또 십년 후, 나는 딸에게 무엇으로 남을까. 고향의 음식맛으로 그애 외할머니가 기억된다면 나는? 개량한복같이 어줍잖은 양심맛으로 남는다면 부끄러운 일이다. 음식맛이 문화의 척도라면 어머니의 손맛은 가풍의 거울이다. 옛맛이란 바로 정성맛이다. 전국이 일일권인 지금 향토맛을 고집하기 보단 우린 딸에게 간이 잘 맞는 정성맛을 물려주어야 한다. 절구는 기계가, 항아리는 쎄라믹통이 대신해도 엄마의 손맛엔 대역이 불가능하다. 나는 공연히 인생을 낭비하고 시간을 과소비하고 있지는 않나 돌이켜 보니 텅빈 돌절구와 항아리에 가득 찬 나의 나심(裸心)이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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