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한일 가톨릭 미술 교류전 관계로 일본 동경에 갔다가 나가사끼에 들렀다. 그곳에 있는 우라가미 성당을 방문하면서 일행으로 부터 ANGELUS의 종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원폭으로 인한 패전으로 폐허가 된 나가사끼의 시민들이 절망에 잠겨 있을때 가톨릭은 폐허속에서 건져 낸 종으로 종각을 세워 아침ㆍ저녁으로 종을 울리게 함으로써 그곳 시민들의 가슴에 재기의 희망과 용기를 심어 주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로마제국에 압박을 받을 때, 성모 마리아에게 가브리엘 천사가 구세주의 탄생을 계시하여 이스라엘에게 구원의 희망을 주듯이 ANGELUS의 종소리는 나가사끼 시민에게 폐허 속에서 희망을 계시하는 종소리였다. 그래서 그곳에는 천주교 신자가 제일 많다. 2백년이란 긴 역사를 지닌 한국 천주교회도 순교적인 영성 위에 울려 퍼진 여명의 햇살로 복음선교의 열매를 주렁주렁 열리게 한 찬란한 ANGELUS의 종소리를 경험한 곳이다. 하늘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그 종소리를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평화의 울림으로 태동한 이 땅의 복음화는 태초로부터 하느님의 사랑안에 울려 나오는 피안의 행복을 이 땅에 전하였고, 지상의 소원을 이상과 순박한 날개로 백조의 호수를 지나 하늘로 전달하는 인간 조나단과 같은 전령자의 비상(飛翔)으로 한국인의 심성에 가득채웠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 종소리는 현대의 변화된 가치 풍조속에 휘말려 그 아름다운 음률을 잘 들을 수가 없게 되었고, 지금은 무엇을 위하여 울려 퍼지는지 삶의 이정표가 없는 혼탁함만 들릴 뿐이다. 이러한 복음화의 전환기는 오늘의 한국 교회안에 당면하고 있는 사목적 정책 결여의 결과가 아닐 수 없으며 소극적 안주형에 머물고 있는 교회의 안일함이라고 본다. 이를 뒷받침하고 있는 예가 80년도 후반을 접어들면서 드러나기 시작한 선교둔화의 현상이다. 이러한 현상은 한마디로 이 시대에 부응한 복음선교 정책 개발을 뚜렷하게 제시하지 못한 교회 자체의 탓에 있다. 따라서 지금이야 말로 한국적 ANGELUS의 종소리를 재현하기 위한 교회의 쇄신과 사목적 비전에 온 힘을 기울여야할 때이다. 그것은 다원화 되어 있는 사회안에 교회의 사목적 다원화를 위한 시도이다.
동경에 있는 주교좌 성당은 건축설계부터 다목적 사목의 활용을 위하여 시도되었다고 한다. 성체를 모신 지성소를 따로 두고 교회의 공간을 신자들ㆍ비신자들 모두가 이용할 수있는 회담의 구실을 하게끔 건축되었다. 이곳에서 문화의 전당으로 온갖 강연회나 예술제 등을 이용할 수 있는 음향과 무대로 장식되어 있고 외인들의 혼례를 치를 수 있도록 예식장으로서의 선처도 아끼지 않을 만큼 공간 활용을 통해 직간접적인 복음선교에 심혈을 기우릴 수 있는 사목적 다원화의 정책개발에 정착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의 성당들은 신자외에는 감히 접근하기 어려운 제한구역으로 설정하여 너무나 신성시하고 있는 실정이다.
항상 열등의식과 패배의식, 좌절감에 허우적거리는 오늘날의 앨돈자들, 그들은 지금도 한국적 ANGELUS의 종소리를 듣고 싶어 피골이 상접한 지친몸에도 불구하고 밤하늘의 별들을 벗삼아 종각으로 모여들지만 그들을 관대하게 포옹하는 구원의 종소리는 그저 혼탁하기만 하다. 인생도 지위도 연령도 생활환경 마저도 허락치않는 아웃사이드에서 헤매는 삶의 방랑객들, 어쩌다가 그들의 고뇌를 푸념삼아 터뜨려 보자고 종을 찾지만 간간이 들리는 종소리의 혼탁함은 이렇게 울리고 있을 뿐이다. 이곳은 당신들이 드나들기에는 걸맞지 않는 신성불가침 지역이니 더러운 오물을 튕기지 말고 저리 가란다.
음률이 좋아 종소리를 내다가 블랙리스트에 오르고 급기야는 힘없는 자들에게 내리치는 칼자루 쥔자의 해고 소리에 생계의 위협을 받고 신문고를 울려 달라고 울부짖지만 종을 아끼는 사람들은 내가 피곤하고 귀찮으니 물러서 달라고만 한다.
아쉬움과 한탄함으로 세인은 자꾸만 교회를 멀리하고 있는데도 그런 세인들이 사는 사회안에 교회의 관심은 어디에다 땅을 구입하고 거기에다 어떻게 웅장한 성전을 짓고 그안에서 불로소득적(?)인 헌금에만 몰두하는데 있다. 또한 그러한 관심거리만이 오늘 이시대의 사목정책 개발에 최우선인양주요한 화제거리로 꼽고 있다.
이러한 교회의 실정이 단순히 하나의 넋두리에 지나는 것이 아니라면 복음선교의 풍부하고 복잡하고 동적인 참모습을 부분적이거나 단편적인 규정으로 못박아 그본질적인 면을 빈약하게 하거나 그르치게 해서는 안될 것이다. 왜냐하면 현대의 참된 복음선교는 인류문화적인 사회복음화를 이룩하는데 있기 때문이다. (현대복음선교 18-21).
따라서 한국교회안에 참된 복음화란 인간의 영적ㆍ물리적 성장과 성숙을 도우며 종말론적 희망안에서 참된 사회발전을 이루는 것이고, 교회의 초자연적인 요소를 최우선으로 하면서도 자연적인 사회문화안에 인간적인 요소도 병행함으로서, 각자가 처한 현실안에 참된 인간 계발과 발전과 완성에 이바지 되도록 하는 사목적 제반 활동인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복음선교가 바로 복음화의 구체적인 실천과제로서 그 대상을 인간 세상 전체로서 인류사회의 내적변화(회개)와 사회복지 증진에 초점을 두어 하느님의 세상구원의지가 실현되도록 하는데 있다면, 이를 위한 교회 내외의 사목적 정책개발은 반드시 개조명 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재조명은 교회가 세상안에 문호를 활짝 개방하고 포옹할수 있는 사목적 다원화의 제반수립이 활성화 되어야 할 것이고, 수십억원을 들여 마련한 성전 공간을 신성시만 할것이 아니라 사목의 다목적 용도로 활용되게 함으로서 모든이에게 모든 것을 적용시킬수 있는 직접선교화 간접선교에 영향을 미치게 하는 것이다.
우라가미 성당에 ANGELUS의종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한국적 ANGELIS의 종소리가 재현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필자는 방주의 창을 통하여 3번째의 메시지를 힘껏 날려 본다.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리시오』(마태22,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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