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선거운동이 한창이던 지난 한 달여 동안 후보들로부터 많은 말을 들었다. 집에 각 후보들의 선거공약집이 배달돼 왔다. 보지 않았다. 정치인들의 공약은 언제나 피부로 느껴지지 않았고 진정성을 읽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대선 후보자들의 TV 토론도 그랬다.
시민들은 그들을 두고 ‘무능한 목사님, 낮술 먹은 할아버지, 화난 초딩 전교 1등, 깐깐한 교수, 운동권 누나’라 불렀다. 말의 성찬이었지만, 먹을 것 많은 뷔페를 다녀오고 난 뒤 속이 더부룩한 듯한 느낌이었다. TV 토론을 시청한 후 남는 것은 그들의 험한 말들뿐, 정책은 없었다.
대선 후보들의 공약들이 난무하던 어느 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한 멘트가 내 귀를 잡았다. 워싱턴포스트(2017. 5. 1.자)를 인용한 내용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100일간 무려 488번의 거짓말이나 오도 발언을 했다. 한 번도 거짓 주장을 하지 않은 날은 10일에 불과했는데 그중 6일은 자신 소유의 골프장에서 시간을 보낼 때였다.”
기사를 찾아보니, 트럼프는 임기가 끝날 때면 ‘피노키오’가 되어 있을 거라는 비판이었다. 게다가 정치나 외교 협상과정을 마치 폐지처럼 여기는 트럼프를 보면서, 그가 요구하는 사드 비용 10억 불도 허망한 소리로 들린다. 마치 노름판에서 던지는 배팅 금액처럼 말이다. 그는 마치 상대방의 감정을 후벼 파는 도박꾼 같았다. 그런데 이 트럼프를 벤치마킹하는 대선 후보가 있었다.
정치지도자는 힘이 센 사람, ‘스트롱맨’이 되어야 한다면서 트럼프처럼 허세를 부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 ‘스트롱맨’에 대한 막연한 갈망은 지도자의 불의와 부도덕, 부패를 용인했고 ‘히틀러’나 ‘박정희’를 불러왔다. 또 지난 십 년 뭘 해도 좋으니 경제만 살리면 된다는 식의 사고는 결국 ‘이명박’과 ‘박근혜’를 만들었다.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지도자는 포퓰리즘(Populism)에 능하다. 흔히 대중추수주의라 이해하는 포퓰리즘은 본디 포풀루스(populus·백성)에서 왔다. 그런데 정작 포퓰리즘에 능한 정치지도자에게 포풀루스는 안중에 없다. 오직 권력만 중요할 뿐이다.
대중을 선동하고 선거철에만 굽실거리는 정치인에게는 자신의 비전만 있지 타인에 대한 배려나 비전이 보이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길가에 쓰러져 있는 유다인을 봤을 때 사마리아인이 느낀 ‘불편한 감각(sense of disease)’이 없다. 강도를 당한 타인을 보고 느끼게 되는 그 불편한 신체감각을 이반 일리치는 타인이 준 선물이라 했다. 이 불편한 마음들이 모여 예수의 죽음을 기억하게 했고, ‘2014년 4월 16일’의 죽음을 기억하게 했다. 하지만 자기중심적인 포퓰리스트에게는 타자로부터 오는 그 불편한 선물은 주어지지 않는다.
그리스도교 전통에는 ‘작은 사람들’이 있다. 하느님의 가난한 사람들이다. 세상이 도덕적으로 해이하고 불의한 정치가 판을 치더라도 하느님 외에는 다른 곳에 눈을 돌릴 수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스스로 자신을 지키고 도울 수 없는 사람들이고, 남은 것은 오로지 하느님을 향한 외침만 남은 사람들이다. 십자가의 주님이 ‘하느님 왜 저를 버리시나이까’라며 외쳤던 그 단말마의 외침은 하느님의 가난한 사람들을 총체적으로 보여준다.
예수께서는 철저히 대중적으로 사셨다. 사람들 사이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보았고, 그 안에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한 철저한 포퓰리스트가 예수였다. 그리스도교의 희망은 처음부터 그렇게 포풀루스에게 있었다. 하느님의 작은 사람들, 포풀루스에게 희망이 있어야 허세를 부리는 포퓰리스트에게 기회가 없다.
한국에 새 대통령이 선출됐다. 새 대통령이 시민의 아픔에 공감하고 불편해하길 기대한다. 대통령의 그 불편한 마음으로부터 정의와 자유를 위한 모든 공적인 행동이 시작될 수 있기 때문이다.
■ 외부 필진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