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당이나 무속을 모르는 한국인은 없다. 그런데 정말 다 알고 있을까 의아할 때가 있다. 이름만 들었을 뿐 그 내용물이 무엇인지를 모른 채 안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은 무교를 그냥 ‘기복 신앙’이라고 하고, 다른 종교인들은 ‘미신’이라고 잘라 말한다. 생각해보면 무교는 지금까지 제대로 평가받아본 적이 거의 없다. 그래서 무교인들조차도 으레 ‘그러려니’ 한다. 하지만 다른 것은 몰라도 터무니없는 공박이나 근거 없는 야유는 삼가야 한다. 그들에게도 믿는 신이 있고, 따르는 무리가 있으며, 거기서 해방감과 살맛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공박과 비난을 퍼붓기 전에 나는 진정 내 종교 안에서 행복을 느끼고 있는가를 먼저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 누가 뭐래도 꿋꿋하게 아니 행복하게 살고 있는 그들을 행복하지 못한(?) 내가 공연히 트집 잡아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때론 선무당이 사람 잡기도 하지만, 그런 선무당이 꼭 무교에만 있으란 법도 없다.
더구나 미신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따지고 보면 종교마다 미신적인 요소가 없을 수 없으니 말이다. 제대로 믿음의 고갱이를 살지 못한다면 그게 다 미신이 아니고 무엇일까. 우선 제 모습과 제 할 일부터 살필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사제인 나는 가끔 점이나 사주를 보려고 펄럭이는 흰 깃발을 찾아 나서는 신자들이 있음을 본다. 일이 얼마나 안 풀렸으면, 얼마나 답답했으면 무당을 찾아갔을까. 그때마다 나는 큰 책임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평소에 따뜻한 말 한 마디와 작은 관심이라도 기울였다면 그렇지 않았을 텐데. 핀잔하기보다 먼저 무심한 내 자신을 탓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점 보러 가는 사람을 무턱대고 칭찬하려는 것이 아니다. 신자 아닌 사람들이 점집을 들락거리는 것도 문제일 수 있는데, 신자라면 곰곰이 따져볼 필요가 분명히 있다. 신앙은 그저 신앙이지 로또나 벼슬이 아니다. 신앙은 무엇이나 신의 축복을 기원하는 것이기에 기복적일 수밖에 없지만, 기복에만 기댈 것은 아니다. 어떤 면에서 신앙은 애틋한 마음을 필요로 하고, 순수함을 지향하며, 지혜를 찾는 작업이라고 할 것이다. 그래서 애틋함이 덜한 신앙은 흔들리기 쉽고, 불순한 신앙은 떠나가기 쉬우며, 타산적인 신앙은 오래가기 어려운 법이다. 이점에서 온갖 의혹과 부패로 가득 찬 국정농단세력의 사이비 신앙이 바로 미신이고 기복이라 할 것이다.
내 주변을 꼼꼼히 살펴볼 일이다. 방마다 십자가를 걸고, 잘 보이는 곳에 성모상을 모시고, 자동차에 묵주를 걸었지만, 기도하는 마음이나 경건함이 없다면 괜찮을까. 자칫 성물이 부적으로 둔갑할 수 있으니 말이다. 성서를 일상화하기는커녕 마치 호텔에 비치된 품목처럼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면, 신심단체 활동을 오직 동아리 모임이나 취미생활 하듯 한다면 정말 괜찮은 걸까. 바쁜 일상을 살다 보면 기도를 주문 외듯 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기도할 때마다 중얼거리기만 할 것인가. 주문도 기도이지만 늘 그래서는 안 된다. 나의 절실함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남을 탓하기 이전에 나를 살피는 것이 먼저다. 기복과 미신이 남에게만 있고, 나에겐 정말 없는지 살펴볼 일이다.
더구나 시대는 바야흐로 다원주의 시대 다종교 시대를 살고 있지 않는가. 세상에는 여러 종교와 학설들이 공존하고 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각자의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뜬금없는 소리 같지만 요즘은 그래서 손자병법이 필요한 시대이다. 남을 알고 나를 알아야 비로소 다원주의를 살고 다종교 시대를 산다고 할 것이다. 나도 모르고 남도 모르는 삶은 편안하긴 하겠지만 정말 뭘 모르는 삶이다. 나는 알지만 남을 모르면 이기주의자의 전형이 된다. 반대로 나를 모른 채 남만 알면 누구(?)만 좋은 인생이 되고 만다. 남에게 미신이고 기복적이라고 지적하기보다 내 신앙에 기생하는 미신적이고 기복적인 것을 걷어 내는 것이 먼저일 것이다. 무늬만 신자라는 말을 들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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