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가을이 되면 서울 홍대거리의 어느 소극장에서 늘 같은 연극을 한다.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15번도 넘게 보았을 것이다. 이해하기 힘들 뿐 아니라, 관람 후엔 늘 해석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베케트는 관객들에게 연극을 보고 집에 가선 ‘무슨 뜻일까?’ 하며 어렵게 고민하지 말고 그냥 실컷 웃으라고 했다. 웃기는 것 같으면서도 슬퍼지고, 슬픈 것 같으면서도 웃음지게 하는 것이 희비극의 의도일까?
GODOT! 사전에는 없는 단어다. 아무도 그 뜻을 모른다. 작가도 그 뜻을 말해주지 않고 떠나갔다. 단지 영어의 신 GOD와 불어의 신 DIEU의 합성어일 거라는 의문스러운 추측은 있다. 그렇다면 해방과 구원이 주제일 수 있다. 하지만 작가는 작품의 동기와 주제는 독자의 몫으로 남겨놓는다. ‘텍스트가 악보라면 독자는 연주자’라는 말이 있다. 악보는 같아도 연주는 다 다르다. 독자마다 다른 주관적 해석의 여지를 남겨놓는 것이 언어예술가의 의도다. 그래야 예술의 영원성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 – 생각과 성격이 너무나도 다른 두 주인공이 나온다. 매일 티격태격 싸운다. 수시로 자신들은 너무 다르니 헤어지자고 한다. 심지어는 ‘같이 죽자’고도 한다. 그러면서도 늘 ‘언제 GODOT가 오시는 걸까?’ 하며 회한의 시각으로 서로를 응시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탐욕으로 무장한 포조라는 지배자를 만나게 되는데 그를 GODOT로 착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피지배자를 노예처럼 굴종시키고 착취하는 식민주의자에 불과하다. 그와 헤어지자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에겐 서로라는 존재의 필요성에 대해서 진지한 감정이 싹트기 시작한다. 식민주의의 진정한 종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직도 GODOT는 오지 않았다. 언제 올지 아무런 기약도 없다. 그래도 그들은 화해했다. 싸움과 동반자살 충동을 멀리하고 그들은 함께 미래를 향해 가기로 했다.
그냥 에스트라공을 남한, 블라디미르를 북한이라 생각해보자. 포조는 식민주의 강대국의 상징이다. 그러면 우리민족의 서사가 나온다. 우리는 기다림에 있어서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민족이다. 수천 년 동안 늘 뭔가를 애잔하게 기다리며 살아왔다. 우리의 ‘고도를 기다리며’는 세계적이다. 1990년 더블린연극제에 참여한 정동환과 송영창을 두 주인공으로 하는 우리의 ‘고도’팀은 우승을 했고, 아일랜드 언론으로부터 “한국의 고도는 기다릴 만한 가치가 있었다”라는 극찬을 받았다. 언어예술의 성지 더블린에서 우리가 1등을 한 것이다.
우리는 반대말을 중시하는 교육을 받고 성장했다. 여자의 반대말은 남자이고, 엄마의 반대는 아빠였다. 우리의 ‘고도를 기다리며’ 공연이 세계적인 이유는 번역가와 연출가가 부부였기 때문이다. 부부가 반대의 존재라면 가능했을까? 왜 노벨물리학상의 닐스보어가 ‘대립적인 것은 상보적인 것이다’는 명제를 설명할 때 우리 태극문양을 사용했을까? 남북도 이제는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처럼 싸움을 끝내고 함께 가야 한다. 세계적인 민족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
윤훈기(안드레아) 토마스안중근민족화해진료소 추진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