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실에서 책 원고를 다듬고 있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휴대폰으로 전화가 왔습니다. 발신자를 보니 전에 수업을 들었던 디지털 아트 전공 여학생이었습니다. “오래간만이구나. 잘 지내지? 교장 신부님 건강은 어떠시니?” 그러자 울먹이며 말했습니다. “교장 신부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서로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전화선 너머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신부님은 몇 년 전에 경기도 한탄강 근처에 작은 학교를 하나 설립하였습니다. 학교를 짓는 데는 많은 돈이 들어갔습니다. 땅을 구입하고 건물을 세우는 비용은 돌아가신 어머니가 남긴 작은 집과 신부님이 그동안 책을 써서 모은 인세로 마련했습니다. 학교 이름을 ‘화요일아침예술학교’라고 붙였습니다. ‘화’자는 꽃 ‘花’자이며 ‘아침’은 매일 맞이하는 아침처럼 ‘희망을 가지라’는 의미였습니다. 전교생이 30명인 초미니 학교로 한 학년이 10명이었습니다. 교사는 재능 기부자까지 합쳐 30명이었습니다. 입학생은 예술적 재능과 꿈이 있는데 가난 때문에 그 꿈을 피우지 못하는 학생들이었습니다. 수업료와 기숙사비는 전액 무료였습니다. 교복도 예쁘게 디자인하여 입혔습니다. 작은 버스도 사서 예쁘게 칠했습니다. 학교 안에 작은 성당과 함께 피정의 집도 지었습니다. 신부님은 학교의 모든 일을 도맡아 했습니다. 학생들이 먹을 음식 재료도 시장에서 직접 사와 요리했고, 학교의 모든 디자인도 직접 만들었고, 학생들이 견학을 가면 손수 운전도 했습니다.
신부님과의 인연은 몇 년 전으로 거슬러갑니다. 뉴스를 통해 신부님이 세운 예술학교가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같은 예술학교인 우리 대학이 학생들을 초청했습니다. 예쁜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미니버스를 타고 신부님과 함께 왔습니다. 캠퍼스 곳곳을 둘러보면서 학생들과 신부님 모두 흥분했습니다. 학생들은 흥미를 갖고 있는 학과가 전부 이곳에 있기 때문이었고, 신부님은 캠퍼스 곳곳의 디자인이 마음에 쏙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신부님은 캠퍼스 방문을 마치면서 “이번 1회 졸업생이 이 대학에 입학하면 참 좋겠습니다”라고 희망했습니다. 그런데 그 해 1회 졸업생은 단 한 명도 합격하질 못했습니다. 그다음 해, 2회 졸업생 중에 한 명이 합격했습니다. 그 합격생이 바로 신부님의 선종 소식을 전한 여학생이었습니다.
장례미사가 명동성당에서 추기경님 주례로 봉헌되었습니다. 백 명이 넘는 사제들이 참례했습니다. 그런데 그 넓은 성당에 가득 앉아 있는 사람들은 신부님이 본당 사목할 때 그 성당 신자들이었습니다. 신부님은 선한 목자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가며 신자들을 돌보았기에 저렇게 많은 신자들이 눈물을 흘리며 미사를 봉헌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이 아름다운 모습을 보면서 ‘신부님은 참으로 행복한 삶을 사셨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제 신부님은 계시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신부님이 뿌려놓은 씨앗들이 착하고 아름답게 자라고 있습니다. 그리고 매년 보란 듯이 예쁜 꽃을 활짝 피우며 향기로운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요한 10,11)
백형찬(라이문도·서울예술대학교 교수·수원교구 호평본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