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는 해다. 오랜 기간 동안 가톨릭교회가 이단으로 규정해온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은 최근 새롭게 인식되고 있다. 베네딕토 16세 전임 교황은 “루터가 이단자가 아니며 중세 가톨릭교회의 부정부패 관습 제거에 있었다”는 입장을 피력한 바가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마르틴 루터는 탐욕과 권력욕으로 타락한 교회에 반기를 든 당시 최고의 지성이자 위대한 개혁가”라고 평가했다.
신앙인은 실제 신앙생활 안에서 루터의 덕을 많이 보고 있다. 평신도들이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된 것도, 강론의 중요성이 강조된 것도, 성가를 부를 수 있게 된 것도 루터 덕분이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거쳐 자국어 중심의 미사전례를 할 수 있었던 뿌리는 루터의 개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루터의 급진성이 당시엔 충분한 공감을 얻지 못하고 갈라진 형제가 되고 말았지만, 부패한 교회의 개혁은 마땅한 일이었다.
종교개혁으로부터 얻은 교훈은 하느님의 나라를 향한 여정 속에 있는 교회는 개혁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교회는 하느님의 백성으로 이루어져 있고 이 백성들은 자기 쇄신을 통해 하느님의 나라로 나아가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때때로 이 여정이 하느님의 뜻과는 다른 길로 향하는 경우가 나타나게 된다. 이를 바로잡는 것이 성령의 인도하심이고 교회 지도자들의 가르침이다. 그러므로 초대교회부터 믿음의 개혁을 촉구하는 말씀이 성경에 빈번히 나타나있다.
개신교 신학자 칼 바르트는 교회의 개혁은 지속되어야 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이는 말씀을 중심으로 제도뿐만이 아니라 신앙인의 부단한 신앙 개조가 필요함을 의미한다. 함께 깨어 기도하고 복음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갈 의무가 신앙인 모두에게 주어져 있다. 세파는 언제든 방주의 키를 틀어 우리를 혼란에 빠져들게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자녀는 신앙생활을 성찰하는 가운데 하느님의 나라를 일구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교회의 모습을 바라보면 성찰의 면모를 찾기 힘들다. 개혁의 의지와 여지가 없는 듯이 보인다. 교구 성직자들의 관심은 외적인 지표와 행사와 성전에 있는 듯하다. 신자수의 증감, 교무금의 증감, 행사의 참여도, 성당 증축 등 외적으로 드러나는 일에 깊은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 교우들도 이러한 사목방침을 말없이 따르고 있다. 신축된 성당이 새로운 사목자에 의해 임의적으로 개축되듯 교회 내부의 중요한 일들이 평신도들과 협의 없이 진행되는 경우가 빈번하다. 교회의 주체는 신자가 아니고 사목자이다. 이 아무 일 없는 듯한 일방적인 여정이 사실은 문제이다. 이를 반영하듯 주일미사는 나눔과 친교와 파견의 의미를 상실하고 단지 주일 참례를 지킨다는 소극적 의미만 남아있다. 절망적인 삶의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강론에 젊은이들은 교회를 떠나고 있다. 그나마 유지되는 기도모임은 말씀이 살아서 삶을 변화시키지 못하여 종종 친목의 수준에서 머물고 만다. 교회가 변화할 때이다.
우리 교회는 루터에게서 배울 것이 많다. 한국교회는 총체적으로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 외적인 지표와 물질적인 차원에 벗어나야 한다. 교구마다 경쟁하듯 짓는 대성당의 건축은 재고돼야 한다. 오히려 영적인 교회로의 내적 개혁을 이루어야 한다. 성직자 중심의 일방적인 사목이 아니라 평신도의 사도직이 함께 어우러지는 소통의 사목이 이루어져야 한다. 모든 교회는 형제적 사랑으로 가난한 교회에 손을 뻗쳐야 한다. 사목자는 세상 안에서 어떻게 복음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지 평신도들과 함께 고민해야 한다. 신앙인은 내적인 거룩함과 하느님의 정의를 회복하기 위해 말씀 안에서 부단히 기도하고 세상일에 참여해야 한다. 하느님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사람에 대한 한없는 사랑과 나눔이 이루어지는 교회를 이루어야 한다. 세상을 위해 우리 신앙인 모두가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교회개혁의 첫걸음을 내디뎌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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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향만(베드로) 가톨릭대 의대 인문사회의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