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적당하다. 서서 가도 그다지 기분 나쁘지 않은 지하철. 발을 밟힐리도 없고 낯 모르는 사람과 부딪칠 염려도 없다. 핸드백도 왼쪽 어깨에 얌전히 걸쳐져 있고 스타킹도 신었던 그대로이다.
오늘은 기분좋게 갈 수 있겠구나 싶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무엇보다도 머리카락이 하나도 헝클어지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
언뜻 백발 노인이 눈에 띈다. 노인 바로 앞자리에는 한 여자가 앉아 있다. 옆에는 네댓 살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어른 한사람분의 자리를 차지한 채 어두운 창 밖을 주시하고 있다. 이제는 거울이 되어 버린 창. 거기에 비치는 사람들의 얼굴을 살펴보는 것일까.
시선 둘 곳이 없어서 늘 곤란했었는데 잘 됐다 싶었다. 맨 먼저 아이 엄마의 태연한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오로지 내 아이만 보호하면 그만이란 듯 아이의 볼을 연신 쓰다듬고 있다.
그 다음엔 당연히 노인의 표정과 맞닥뜨려야 했다. 거울은 노인의 얼굴을 그대로 보여 주었다. 서서 가야 한다는 불편함은 둘째치고라도 인생의 황혼길에 느끼는 허탈감. 나만 편하면 된다는 식의 이기적인 사고방식에 대한 분노. 이제나 저제나 자리가 비기를 기다리는 그 희망과 인내심이 엇갈린….
그래도 지하철은 달리고 있다. 간간이 사람들이 빠져나가고 그자리가 채워지긴해도 노인의 앞자리는 변함이 없었다. 다만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있는 노인의 표정이 조금 곤혹스러워 보인다는 것과 손잡이에 매달린 손이 불안해 보인다는 것밖에는.
아이는 흙투성이 신을 신은 채 의자에 올라앉아 있다. 무임 승차에다 공공기물까지 더럽히고 있다니.
노인은 아이의 흙 묻은 신이 자신의 몸에 닿을까 봐 전전긍긍이다. 신을 벗겨 주든가. 비닐을 씌워 주든가. 아이를 안아 주면 한 사람이라도 더 앉을 수 있어서 좋으련만 아이 엄만는 끝까지 태연하다. 그리고 당당하다.
아이 옆에 앉은 말끔한 신사복의 남자는 감은 눈을 뜰 생각도 하지 않았으며. 연인들은 키득거리기에 정신없다.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다.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닌 그런 광경에 너무 익숙해져서일까.
지하철은 계속 달리고 있었고 목적지에 도착한 나는 가슴이 답답했다. 아무말도 못한 채. 끝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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