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하느님 자녀가 된것은 1977년 7월 17일 서울 왕십리성당이었습니다. 21살때 아버지를 여의고 23살때 어머니마저 돌아가시고 제 밑으로 중학교 3학년짜리 남동생과 국민학교 5학년된 여동생을 남겨놓은채 부모님은 모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눈앞이 캄캄하고 살아갈길이 막막했습니다. 너무 고생스럽고 마음 의지할 데가 없어 성당을 찾게 되었죠. 10여년을 동생을 뒷바라지로 안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고생하면서도 주님이 계심에 항상 마음은 든든 했습니다. 부모님이 모두 세상을 떠나신 순간 제 앞길은 포기하고 동생들을 위해 살아야 하겠다는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모진 고생끝에 제나이 33살 때 남동생을 결혼시키고 35살 때 막내동생마저 결혼시키고 나니 제 나이로는 결혼 같은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죠. 그렇다고 해서 서울에 그냥 머물러 있으면 저희들 때문에 희생하고 혼자 사는 것이 마음에 쓰일 것 같기에『어디간들 혼자 몸 못살겠나』싶었습니다. 또『나에게는 예수님과 성모님이 계시질 않은가』하고 84년도에 충무로 내려왔습니다.
충무에는 언니가 살고 있었습니다. 3개월동안 쉬면서 일자리를 찾아다녔습니다. 마침 식품회사에 들어가게 되었죠 그곳에서 열심히 일했습니다. 마침 그 회사에서도 정식 여공으로 인정받고 표창장도 받았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전기 계장이라는 사람이 저에게 접근해 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신앙인이고 노처녀라는 소문을 들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날이가면 갈수록 더욱 심해지는 성화에 못이겨 다방에서 만났습니다. 자기의 딱한 처지를 이야기 하는데 병든 73세된 어머니와 아이 셋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어이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나는 결혼할 생각도 없고 또 더구나 결혼한 적도 없는 내가 어떻게 남의 속으로 낳은 자식을 키울 수 있겠느냐』고 거절했습니다. 그랬더니 자기가 보기엔 충분히 할 수 있다고 믿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사람은 믿음을 가진 사람을 찾았다며 자기의 어려운 처지를 도와달라고 사정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음이 약한 저는 동정심이 일고 있었습니다. 집에 가서 언니한테 이야기를 했더니『그사람의 처지는 딱하지만 네가 여짓껏 고생한 것도 많은데 그것도 모자라 그런곳에 가겠냐』하며『저에게 미쳤냐』고 했습니다.
언니 말을 듣고보니 정말 더이상 고생을 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충무에서 2년 생활하는 동안 언니친구한테서도 중매는 많이 들어왔습니다. 그래도 나는 혼자 살거라고 거절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한두번 만나다보니 그사람에게로 마음이 끌리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청혼에 승낙만 해준다면 자기도 열심히 성당에 나가고 절대 고생 안시키겠다고 침이 마르도록 사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토록 사정하는 사람의 청을 더이상 거절할 수가 없었습니다.
애 엄마였던 사람은 몇번 가출 끝에 결국 바람이 나서 이혼을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를 이토록 필요로 하니 불쌍한 사람끼리 서로 위로하고 아끼며 살아보리라 결심하고 언니한테 또 의논을 했습니다. 언니는 네마음이 그렇다면 그집에 가서 네가 적응 할 수 있겠는가 한번 가보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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