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을씨년스런 가을날, 나는 버스를 기다리며 손가락에 낀 반지를 쉼없이 만지고 있습니다. 반지라 하지만 남의 눈을 끌만큼 번쩍번쩍 하는 보석반지는 아닙니다 14K 묵주반지입니다. 그러나 나의 일생 동안 이 반지처럼 소중하게 오래 간직한 반지는 없습니다. 반지 끼고 액세서리 찾을 삶이 아니었고, 성격상 통 관심이 없다보니 그쪽에는 문외한이었지요. 또 하나 손 생김새 자체가 그런 걸 낄 자격이 없는지도 모르지요.
한데 이 묵주반지는 웬일일까요. 내 손에 꼭 어울리는 것 같고 꼭 끼어야만 하는 것이 불문율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수호신처럼 귀중한 이 묵주반지가 여간 수난을 겪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의 수난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내 신앙의 척도로 될만큼 많은 우여곡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게 반지, 손가락, 주인 중 누구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잃었다가 다시 찾는 일의 연속이었습니다.
『아가야, 내 묵주반지 좀 찾아 줄래?』『네, 어머니, 반지 찾아드릴테니 얼마 주실래요?』
『부르는 게 값이다.』『네 2백원만 주세요.』이 정겨운 대화도 묵주반지 덕이지요.
아들이 이사를 가게 됐는데 잔금을 은행에서 대출하게 되었지요. 대출서류를 접수하러 갔습니다. 그런데 대출창구에 좀 겁나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습니다. 은행 사정상 중도금 대출은 중단한다는 말이었지요. 그런데 은행직원은 접수만 해놓고 가라고 쉽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잘되는구나, 하고 나오려는데 그 직원이 덧붙이는 말이 참고적으로 잔금 지불날짜까지 안나올 확률이 훨씬 높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대비하라고 미리 알려준다는 것이었습니다.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고 황당한 나머지 언성이 높아지고 옥신각신하게 되었지요. 그 분은 자신은 창구담당이 아니라면서 사정이 딱해서 미리 말한 것뿐이라고 하더군요. 횡포니 폭력이니 하면서 묵주반지 낀 손으로 하는 삿대질(?) 섞인 거친 말이 막 나갔는데도 그분은 잘되는 쪽으로 처리해 주겠다면서 성의있게 대해 주었습니다. 나오면서 며느리가 말하였지요. 『어머니, 그 아저씨는 어머니 묵주반지 끼신것 보고 잘해주시려고 하다가 혼이 나셨네요. 그 아저씨도 묵주반지 끼셨어요』
그렇습니다. 나의 이 소중한 묵주반지는 언제나 나의 신앙처럼 떠났다가도 다시 돌아오는 어떤 보석보다도 값진 존재입니다. 거칠고 험한손가락에서 빛을 내면서 다이아몬드처럼 날카롭게, 내게 접근하려는 불의와 악을 사정없이 잘라줍니다. 이 묵주반지가 나의 동반자로 내 손가락에서 영원히 빛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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