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말 한 분의 노사제가 고국 땅을 밟았다. 그분은 일제의 강점으로 이 땅 전체가 영어의 몸이었던 암울한 시기, 어쩔수 없이 고국산천을 등진 수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만주로 떠났다. 1942년의 일이었다. 그의 파견은 중국의 조선인 신자들의 사목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파견은 곧 사제로서 그의 삶이 고난의 길로 접어들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사제로 서품된 지 7년 만에 32살의 나이로 양들을 찾아 떠난 청년사제는 83살의 노령이 되어 고국의 품에 안겼다. 혈기왕성하던 건장한 한 사람의 젊은이는 훨체어에 몸을 의지한 채 그의 조국과 다시 만났다.
중국이라는 대륙이 「왕조」에서 「공화국」으로 다시 「사회주의 국가」로 변신을 거듭하는 동안 고국으로 되돌아올 기회가 몇 번이나 주어졌건만 그는 그 기회를 거부했다. 그에게 맡겨진 양들을 떠날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양들의 고난을 결코 외면할 수가 없었던 그는 한사람의 목자였기 때문이었다. 그가 바로 지난해 12월29일 중국으로부터 귀환한 전주교구 소속의 임복만 신부다.
임복만 신부가 일제로부터 해방된 조국을 찾아 귀환을 하지 못한 이유는 그의 회상(回想)에서 뚜렷이 드러나고 있다. 귀국상담을 위해 찾아간 당시 만주국 소속의 장춘교구장 고 주교는 임 신부의 귀국의사를 듣고 다음과 같이 물었다. 『남아있는 양들이 얼마나 됩니까』임 신부의 대답『많습니다』주교의 질문이 이어졌다. 『그렇다면 목자가 자기 양을 버리고 갈 때 그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임 신부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고 주교의 질문을 통해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목숨까지 바친다는 주님의 말씀을 떠올렸고 임 신부는 자신의 양들을 위해 생명을 바칠것을 결심하게 된다. 그 결심은 곧 고난이라는 현실로 이어졌다.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를 타이완으로 몰아낸 모택동 정부, 곧 공산당 정부는 그들의 방식대로 거대한 대륙을 요리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인민을 위한다는 그들의 개혁에서 「인민의 적」으로 분류된 종교의 시련은 이미 준비된 것이기도 했다.
가톨릭교회의 시련은 남달랐다. 공산정부에 있어 종교가 「인민의 아편」인 점에서는 여타 종교와 다를 바 없겠으나 가톨릭교회의 경우 로마 교황청이 뒷배경으로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껄끄러운 대상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중국 공산당의 등장은 곧 외세의 전면적 배격을 의미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건물 등 교회재산이 몰수되고 성직자들이 투옥되는 상황에서 임 신부의 투옥은 너무도 당연한 귀결이었다.
아직 구체적으로 알 수가 없다. 노사제는 말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변의 증언만으로도 우리의 이해는 충분하다. 뿐만 아니라 임 신부와 그의 동료 사제들, 교회가 겪어야 했던 어려움은 그들만의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도 우리의 이해를 도와주고 있다. 그것은 12억 인구의 중국대륙이 함께 겪어야 했던 공동의 아픔이자 몸살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지난 50여 년은 그로부터 젊음을 가져갔으며 건강을 빼앗았지만 그의 양들만은 빼앗지 못했다. 중요한 것은 바로 그 점이다. 우리는 그가 그의 양들을 떠나지 못했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그의 지난 50년을 미루어 짐직 할 수가 있다. 공산주의 사회 구조 속에서 자산계급으로 분류되는 지식분자들과 종교분자들의 위치는 새삼 거론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아마도 중국대륙 만큼 종교와 종교인의 위치가 낮밤으로 변하는 지역은 이 지구상에 또 없을 것이다. 변화의 물결과 더불어 시작된 이 변덕스러움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바로 이 변덕에 걸맞게 어떤 이들은 「10개의 조건이 풀렸는가 하면 다시 10개가 조여지는 상황」이 바로 중국의 정책이라는 풀이를 내리고 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들어선 이래 가시밭길의 연속이었던 중국의 교회였지만 그건 전초전에 불과했다. 1966년 시작된 「무산자 문화대혁명」(無産者文化大革命), 이른바 「문화혁명」은 중국인 모두에게 악몽이었으며 종교인들에게는 그 이상이었다. 76년까지 10년간 이어진 문화혁명 기간중 중국의 교회는 철저히 파괴되고 황폐화되었다. 아니 표면적으로는 죽고 묻혀버렸다는 표현이 보다 적합할지도 모른다.
「지하교회」는 물론 「중국 천주교 애국회」라는 이름으로 존재하던 「지상교회」조차 그 태풍을 피할 수가 없었다. 강제로 옷을 벗기운 성직자 수도자들이 감옥과 수용소에서 그들의 반 애국적 행동을 속죄하는 강제노역에 동원됐다.
「중국 최대의 오류」로 그들 스스로에 의해 호되게 비판을 받고 있는 문혁의 최대 희생자는 다름 아닌 교회였다.
양의 곁을 떠나지 못했던 임복만 신부. 다가올 고통과 고난의 형태를 눈으로, 피부로 부딪치면서도 그는 그의 양을 지키고자 최선을 다했다. 50년 세월동안 그가 대면하고 수용할 수 밖에 없었던 아픔은 그래서 더욱 값진 것인지도 모른다.
현재 중국은 계속 변화하고 있다. 교회의 눈으로 볼 때 변화는 참으로 큰 희망을 준다. 이미 그 변화의 혜택을 교회는 상당한 부분에서 맛들인바 있다. 임복만 신부의 귀환은 변화하는 중국의 뚜렷한 상징이기도 하다. 아직은 『확실한 감을 잡기 어렵고 완벽한 미래를 노래할 수가 없어도』 중국의 교회는 변화하는 중국의 대표적 표상이 되어왔다.
「지상」과 「지하」라는 두 개의 교회를 마주한 바티칸의 고민을 일단 뒤로 제쳐두고 우리 모든 신자들은 노사제, 임복만 신부님의 귀환을 진정으로 환영한다. 양들을 위해서라면 투옥과 노동, 다시 투옥과 노동의 반복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그의 사제적 삶은 철저히 나태하기만한 우리들의 신앙을 돌아보게 하고 있다. 우리는 그분의 투명한 신앙의 자를 통해 우리의 신앙을 점검해 보아야만 한다.
임 신부님 참 잘오셨습니다.
<취재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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