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일이 하도 어지러이 돌고 돌아 세시(歲時) 조차 가늠키 어려운 이즈음이다. 비록 손꼽아 엊그제 일이로되 그 사이 달력으로는 한 해를 성큼 건너 뛴 탓인지 말과 행동 사이의 아귀가 맞지 않고 엄범부렁하다.
「나」아니면 나라가 금방이라도 요절날 것처럼 수다를 떨던 선거판하며 일년지계(一年之計)를 장황히 펼쳐보였던 오만가지 일들이 생각하기 따라서는 오랜 일처럼 덤덤히 느껴진다. 우리 심성이 빨리 달아오르고 식어가는 푼수라 할 수 있다.
새로운 사실에 구태의연하는 것도 탈이지만 반면 엄존하는 사실을 잊고 있는 착각 또한 문제이다. 매사 추이를 가늠잡지 못할 때 판단을 그르치기 쉽다. 연도가 바뀌고 정권 교체를 눈앞에 둔 과도기적 상황에서 자칫 착각에서 비롯한 오상(誤想)을 경계해야 한다.
연초에 찾아 볼 수 있는 보편적 착각은 아무래도 잘못 짚은 천간(天干)과 지지(地支)인 것 같다. 일컬어서 지난 1월1일이 1993년 세초임에는 틀림없으나 계유원단(癸酉元旦)일수는 없다. 일부 언론은 간지상으로 시퍼렇게 살아있는 임신(壬由)년을 펀의상 깔아뭉긴 채 새 것을 앞당겨 인용하기를 서슴치 않았다. 그러나 「닭」을 억지로 울렸다 하여 새 아침이 열리는 것은 아니다.
연초의 착각은 이에 그치지 않고 있다. 분명히 오는 2월24일까지는 이 나라를 치정할 대통이 6공의 몫인데도 불구하고 새 정권에 아부하는 정상배의 물밑줄대기가 횡행하여 레임덕 현상을 가중시키고 있다. 이는 유종의 미를 남겨야 할 6공을 위해서나 좋은 시작을 기대하는 「7공」 모두에게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따라서 경우와 분수를 가리지 못하는 무리로 하여금 부질없는 착각에 빠지지 않도록 양심적 위정자의 의연한 자세가 필히 요망된다.
흔히 남의 재산을 탐내는 좀도둑에 대해서는 경계를 늦추지 않으면서 정작 나라를 그릇되게 다스리는 사이비 정치인의 해악에 대해서는 덤덤한 사례가 없지 않다. 좀도둑은 그런대로 뉘우침이 빨라 구제받을 여지가 있으나 구차연하는 정치노선의 오도는 그 심각성에 비추어 더 이상 관행으로 묵과해서는 아니된다. 그동안 부정행위를 성토하는 소리는 있어도 정의에 배치되는 언동에 대한 불감증을 교정하기에 지금이 적기가 아닌가 싶다.
바야흐로 어둠을 가시어 밝은 하늘아래 풀뿌리 민주주의를 살찌게 할 문민정치가 열리려 하고 있다. 긴 터널을 끝내고 아름다운 누리를 열기에 빛은 그토록 소중한 것이다.
일찍이 이스라엘의 한 선지자는 부르짖었다. 『파수꾼이여 밤이 어떻게 되었느뇨. 파수꾼이여 밤이 어떻게 되었느뇨』(이사야 21, 11). 우리도 그처럼 지루한 밤이 속히 지나가기를 바래왔다. 밤만으로 이루어진 세계가 있다면 그것은 분명히 죽음의 세계이며 때문에 광명의 아침을 갈망하는 것이다.
이제 계유년이 열리고 때맞추어 새 정권에 의한 새 정치가 펼쳐지려 하고 있다. 이때에 즘하여 그간 많은 시행착오가 무엇에서 비롯했는가를 반성해야 하며 어둠의 실체를 깨닫는 것이 곧 밝음을 돋보이는 요소임을 깨우쳐야 한다.
이런 연상 끝에 떠오르는 것은 최근 신문에서 무심코 보아 넘겼던 어느 재벌그룹에 익한 이미지 광고내용이다. 『사람들 아는 것은 가마 타는 즐거움뿐(人知坐輿樂) 가마 메는 괴로움을 모르고 있네(不識員輿苦)』. 여기서 조선 후기의 실학을 집대성한 정약용(茶山丁若鏞)의 경구가 돋보이는 까닭은 오늘의 정치상황으로 미루어 각기 나름대로 반추할 교훈이 담겨져 있어서이다. 일찍이 그가 봉건관료들의 그릇된 정치를 비파하면서도 「목민심서」(牧民心書)를 통해 행정적 제반원칙과 규범들을 바로잡은 선인이라는 점에서 후진이 지녀야 할 일깨움이 크다 하겠다.
특히 이번 대선에서의 승리자는「꽃가마」탄 기쁨 못지않게 오랜 야인생활 동안 겪은 「가마 메는 괴로움」을 두고두고 잊어서는 아니된다.
그렇다고 모진 시집살이 끝에 시어미가 되면 새며느리를 더욱 구박한다는 풀이로서가 아니다. 스스로 겪은 질곡은 또 다시 남에게 되풀지 말자 함이다.
고사에 「천하를 마상(馬上)에서 누릴수는 있어도 마상에서 다스릴 수는 없다」고 했다. 가는 곳마다 말굽아래 정복할 수는 있어도 이를 정치하자면 안장에서 내려서야 백성과 대등의 인격을 지닐수 있다는 비유이다. 나만의 이익에 집착하다 보면 남의 어려움을 지나치기 쉽다. 빛나는 보람을 차지하고 나서 정작 거쳐온 그늘진 과거를 잊는다는 것은 특히 경계해야 할 대목이다.
그러나 이렇듯 불신을 낳게 한 책임은 위정자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잘낫 건 못낫 건 간에 그를 뽑은 유권자에게도 지탄을 모면할 수 없다. 비록 공약실천을 게을리 한 당사자가 잘못임은 두말할 여지없다 하더라도 그들로 하여금 오상을 품게 한 원인은 바로 유권자로 하여금 업신여김을 받게끔 한 헛점에서 비롯하다.
이 점 벌써부터「가마탄 사람이 채찍질」하는 기분에 들떠있는 일부 정상배의 미몽을 깨우치기에 정신을 차려야 진정 아침을 알리는 닭소리를 들을수 있다. 방금 신구(新舊) 교체하는 정치세력은 모두가 만감이 교차하는 기분일 것이다. 차제에 떠나는 사람에게는「끝이 좋으면 전부가 좋다」 고 했듯이 결자해지(結者解之)의 마무리를 당부한다.
이 경우 새 집권자로 하여금「시작이 좋아야 끝이 좋다」는 또 다른 최선의 기동 있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문자 그대로 돌아오는 계유년은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을 이룩하도록 거듭 공동체로서의 의무를 다할 것을 간구하는 까닭이다. 진정 파수꾼이여 밤이 개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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