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년 5월, 우리 가족은 참으로 기쁜 나날을 보내고있었다.
진우는 며칠전에 사준 새 구두를 신고 새 잠바를 입고 김밥과 과자를 싸서 신나는 소풍을 갔다. 그러나 그 김밥이 진우에게는 가족과의 마지막 나눔이었다. 진우가 교통사고를 당한 것이다. 『세상에 이런 일이 우리 진우에게 닥칠 줄이야…』
사망 소식을 듣고 영안실에 도착해 그 앞에 앉았을 때, 나는 슬픔과 암담함으로 정신이 없었다.
차츰 정신이 들면서 성모님의 고통이 생각났다. 성모님의 그 아픔을 이제야 내가 조금이나마 느끼는 것 같은 마음이었다. 「진우는 아직 어린 아이인데…」하는 생각을 쉽게 떨치기 어려웠지만 그래도 십자가 아래 성모님의 고통에는 비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나는 슬픔을 억누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예수님을 부활로 이끄신 하느님은 역시 나보다 앞서 계시며 나를 위로하고 계셨다. 어느날 같은 본당의 안젤라 자매님에게서 점심을 같이 먹자는 연락이 왔다. 더운 점심과 진하게 끓여놓은 아욱국을 떠주며「아가다, 요즘 무슨 밥이나 제대로 먹겠어? 그래서 같이 점심이나 먹자고 불렀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난 정말 목이 메어 눈을 들고 바라볼수 없었다. 부끄러움과 고마움에 침을 삼키는 척하며 눈물을 삼켰다. 사랑의 눈길속에 그 정성어린 아욱국과 점심을 먹는동안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무엇을 조금만 먹어도 그냥 뱉어내던 창자도 그 사랑의 보약(?) 앞에서는 아무 저항도 못했다. 「고통은 견딜수 있을 만큼만 허락하신다」는 옛 성인의 말씀을 마음으로 되뇌이며 나는 그 보약을 먹고 큰 효과를 보았다.
그날 이후로 진우가 생각나 눈물이 나오려 하면 나는 고통받는 성모님과 아욱국을 생각했다. 얼굴에 그림자를 없애고 웃는 얼굴로 보답해야 한다는 생각에 슬픔을 삼키며 하루하루를 지냈다.
92년 5월 성모의 성월. 4년전의 그 시기를 보내며 나를 돌이켜 본다. 성모님은 나를 어떻게 보고 계실까? 나는 그렇게 크신 사랑으로 너무나 빨리 치유를 받고 일어설 수 있었는데, 나는 이웃가 무엇을 얼마나 나누며 살았는가?
이제는 맛있는 아욱국과 더운 밥 한 공기가 필요한 이들에게 다가가야겠다. 본당신부님의 위로의 눈길과 아욱국을 맛있게 끓여주신 안젤라 자매님, 그리고 그밖에도 많은 분들의 열려와 기도를 생각하며 이제 나도 마음을 좀더 아름답게 가꾸어 가야겠다고 다짐해본다.
지금도 성모님은 고통속에 헤매이던 나와같은 이들에게 따뜻한 사랑의 아욱국을 함께 나눌 손길을 찾으시며 서성이시리라. 이맑고 푸른 5월의 하늘 아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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