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님의 이야기를 다시 해야하겠군요. 돌아가시기전 어머님은 친구분이나 교우분들이 기도해드리러 오시면 말끝마다 『우리 며느리 신문에 좀 내어달라』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씀을 들을때마다 더 잘해 드리지 못하는 것이 죄송스럽고 한편으로는 고통속에서 살아온 모든 것이 위안이 되었습니다. 돌아가실 때가 이르자 어머님은 『하느님께 감사드린다』고 하셨습니다. 『비록 하느님의 진리는 잘 모르지만 나에게 죽을 복을 주신것같다. 너를 우리집에 보내주셔서 어린것들을 맡겨 편히 눈감게 괴었구나』하시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저는 어머님의 임종이 얼마남지 않았음을 느끼고 성당으로 전화를 걸었죠. 그랬더니 신부님과 수녀님이 급히 성체를 모시고 오시어 어머님은 마지막 가시는 길에 거룩하신 예수님의 몸을 영하시고 운명하셨습니다.
저는 어머님이 돌아가시는 날까지 시어머니로 생각않고 나를 낳아준 친정어머니 이상으로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저는 결혼하자 시어머님을 엄마라고 부르며 살았습니다. 저는 어렸을때 어머니께서 얼마나 엄하게 가정교육을 시켰던지 엄마라는 말은 물론 어리광 한번 못부려본채 친정어머니는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것이 한이 되어 시어머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어머님이라고 불러드려야 당연한 줄알지만 엄마라고 부르고싶은데 어떠시냐고 여쭈어 보았더니 쾌히 승낙해 주셨습니다.
친엄마로 생각하고 살았기에 흉칙한 상처를 아침저녁으로 마주하면서도 그 고통을 참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일년반 엄마를 모시고 4남매를 키우면서 겪은 갖가지 어려움을 글로는 다 표현할 수도 없습니다. 제가 힘이 들고 괴로울때면 저는 주님께 매달리곤 했습니다. 『주님께선 고통을 주시면 그 고통을 이겨나갈 수 있는 힘도주심을 믿고 있으니 저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이세상 다하는 날까지 제십자가를 끝까지 지고 갈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하고. 지금도 생각하면 성모님의 도우심과 하느님의 크신 사랑이 없었다면 또 제가 주님께 의지하는 힘이 없었다면 오늘에 제가 이 자리에 있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어려운 가정에 들어와 사는 것을 안스러워 하시며 늘 격려해주시던 서정술 신부님이 88년 10월에 마산 구암성당으로 가신지 얼마후였습니다. 4남매를 데리고 새벽미사에 참례하고 나오는데 수녀님이 저를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무슨일이 신가하고 가보았더니 12월호 경향잡지를 건네주시며 서신부님이 엔리카씨를 잡지에다 쓰셨으니 가지고 가서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습니다.
집에와서 읽어보니 「미풍양속을 걷는다」에다 뻴리깐의 삶이라는 제목으로 제가 살아오는 과정을 지켜보시고 쓰셨던 것입니다. 자기 가슴을 쪼아 새끼새에게 살과 피를 먹여서 키운다는 뺄리칸의 새에 비교해서 저의 삶을 쓰신겁니다. 늘 인자하시고 자상하시던 신부님께서는 저의 고통과 아픔을 피부로 느끼셨던 것 같습니다. 제가 살아오는 동안 신부님께서 여러가지로 도와주심을 잊을수가 없답니다. 신부님과 이별하는 이 시점에서 그동안 저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 무엇으로 보답하겠습니까. 눈물이 앞을 가려 울먹이는 나에게 『아이들 잘 키우고 모든것 참아가며 열심히 살아가면 그것이 보답』이라는 말씀이 지금도 제 궛전에 생생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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