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인생에 있어 가장 큰 고통의 하나라고 할「아들의 죽음」을 당한 뒤로 자연히 고통의 문제에 집착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고통에 관한 한 정답은 없다. 나자신도 잘 모르기 때문에 거듭 거듭 생각하게 되는 지 모른다.
나는 다만 하느님을 믿을 뿐이고, 아버지신 하느님의 사랑을 믿는다.
하느님은 약속대로 내가 고통을 겪고 신음하는 곳곳에 함께 하여 주셨다. 그리고 위로와 희망, 기쁨을 보내주셨다.
우리가 하느님과 사랑의 관계를 맺지 못한다면 우리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게 되고 희망도 갖지 못할 것이다. 우리의 고통은 사랑의 실패에서 연유되는 수가 많다.
어떤 고통이 닥쳤을 때, 우선 내가 무엇을 잘못해서 그런가, 반성해 보게된다. 고통은 언제나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쳐주며, 우리를 변화시키고 성장시킨다. 고통은 거만한 사람을 겸손하게, 거센 사람을 온유하게 만든다. 고통은 생각할줄 아는 사람에겐 생각을 할수 있게 해준다. 고통은 우리에게 진실을 요구하며, 가식없는 나를 보여주기를 요구한다. 분명 새로운 삶으로 전환시키는 동기는 고통의 체험과 관련이 있고, 고통을 통해서 성장한다. 고통으로부터 도망치기보다 그 고통을 직면할 째 진실한 사람이 된다.
우리의 죽음과 고통은 아담의 조로부터 시작되었고, 하느님의 독생성자 예수그리스도는 내 죄때문에 십자가를 지셨다.
그분 앞에 내 고통이 너무 크고 내 십자가가 너무 무겁다고 차마 말할 염치가 없다.
참사랑은 상대방의 좋은점뿐 아니라 그의 약점까지도 포용한다. 예수님을 따르고 사랑한다면, 그분의 고통도 함께 나누고, 그분의 십자가까지도 나누어 지고 싶어지는게 당연하지 않은가?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 뒤를 우리도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야한다. 그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에 동참하는 길이다.
가장 큰 고통을 당하는 사람, 가장 무거운 십자가를 진사람이 아마도 십자가를 지고 앞서 가시는 예수님을 뒤를 가장바짝 따라가는 사람일 것이다.
이세상 전체가 그나마 지탱되고 유지되는 것은 고통 당하는 이가 있음으로 해서 가능한 것이 아닐까? 인간의 죄의 무게와 십자가의 무게가 비등하게 될 때 균형잡힌 세상이 되는 것이 아닐까? 죄를 짓는 사람과 보속하는 사람이 같은 사람일 수도 있고, 죄를 짓는 사람과 보속하는 사람이 다를수도 있다는 이치가 될까?
아무 죄없는 사람이 고통 당하는 건 무슨 이유일까? 어떤 경우엔, 선량한 사람이 악한 사람 대신 십자가 지는 역(役)을 맡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악인은 스스로 보속할 능력이 없으므로 선량한 사람이 대신 보속을 한다는 이치가 성립될까?
고통은 전혀 본의 아니게 주어지는 수도 있지만 순전히 자기 탓으로 불러오는 수도 있다. 인간은 자기 탓으로 불행을 자초하는 수도 허다하다. 그런 경우에도 하느님을 원망하는 수가 얼마나 많은가?
고통이 사람의 지성과 의지와 무관하게 닥쳐올 때, 사람의 책임과 전혀 상관이 없을때 부조리라고 한다. 그러나 부조리의 고발이 우리의 고통을 줄어들게 하지도 않고 우리가 궁극적으로 고통을 극복할 수 있도록 하여 주지도 않는다.
우리는 고통과 정면 대결하여 싸울 것이 아니라, 고통을 가볍게 질 수 있는 힘과 용기를 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고통을 정면으로 받아 안고 쓰러지는 것보다 고통을 옆으로 비스듬히 스쳐보내고 꿋꿋이 서는 은총을 구하여야 한다. 그 은총은 깊은 신앙에서 오는 것 같다. 하느님과의 사랑의 관계가 긴밀할수록 고통을 가볍게 질 수 있는 것 같다.
신앙이 깊은 사람은 하느님의 생각, 하느님의 시각(視覺)에 가까워진다,
인간의 가장 극한 상황인 죽음까지도 하느님이 보시기엔 별것이 안 날것이다. 영겁(水劫)이란 무한한 시간 속에서, 19년을 살았느냐, 80년을 살았느냐, 그것이 무슨 대단한 차이가 나겠으며, 이 세상에 살고 있느냐, 저 세상에 살고 있느냐가 무어 그리 다를게 있겠는가? 다만 인간이 『아이구! 살았다』하며 심하게 갈라놓은 것이다.
결국 사랑은 고통을 이긴다. 누구를 지극히 사랑해 본 사람은 이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아름답고 순결한 사랑속에는 신의 은총이 깃든다. 남편을, 자식을, 혹은 연인을 골똘히 사랑하는 사람은 고통을 이기는 힘을 얻는다.
예수님을 지극히 따르고 사랑하는 사람은 고통을 이긴다. 그가 지고 가는 십자가가 가벼워진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십자가를 가볍게 질 수 있는 은총을 주신다.
우리가 고통을 면할 수는 없으되 하느님은 고통을 이길 수 있는 은총을 보내주신다. 그러나 사랑할 줄 아는 자만이 이 특은을 누릴 수 있는 것 같다.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들어갈 수 있는 하느님 나라」란 제목의 어느 신부님의 강론은 많은 위로와 희망을 안겨주었다.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비추어보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로마서8, 1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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