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외할머니는 약국집 딸이었다. 외중조할아버지께서 한약방을 경영했던 까닭에 외할머니는 어깨너머로 배운 침술과 제약법이 뛰어나 6. 25후 남한으로 피난을 와서 많은 환자를 치료해 주는 은덕을 쌓았다.
그런데 신기에 가까운 침술을 지닌 외할머니는 한문은 고사하고 한글도 읽을 수 없는 문맹이었다. 허긴 여인네에게 글을 가르치지 않던 외할머니대의 여인이 한글을 읽을수 없는 것이 외할머니 뿐이었겠는가. 대다수의 여인들은 까막눈인 채 문맹을 운명처럼 껴안고 살았을 것이다. 그래도 서북지방은 일찌기 개화하여 여식에게도 글을 가르치는 집이 꽤 있었다고 하는데 외할머니가 문맹이었던 것을 보면 나의 외증조부님도 어지간히 완고했던 모양이다.
어쨌거나 외할머니는 한글을 한자로 읽을 수도 쓸수도 없으면서 내가 책을 펴놓고 숙제를 할 때면 꼭 내 곁에 붙어 앉아 신동을 바라보는 눈길로 내 온 전신을 덮곤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손녀딸이 글씨를 척척 읽고 쓰는 것이 여간 신기하고 부러우셨던게 아닌 모양이었다. 그런데 외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시고도 십수년이 지난 요즈음 나를 충격적인 사실을 알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문맹은 외할머니대 내지는 내 어머니 대에서 끝난 줄 알았는데 아니면 적어도 나와 같은 세대에서 마감을 했을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의외로 문맹이 많다는 사실이었다.
은행에 가서 예금 청구서를 쓸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자녀가 학교에서 받아온 가정통신물도 읽을 수 없는 젊은 엄마들도 의외로 많다는 얘기다. 은행창구에 서서 문맹임이 부끄러워 눈이 잘 안보여서 그러니 예금청구서를 써달라고 멋적은 표정으로 부탁하는 예가 많다고 한다. 선생님이 자녀에게 들려보낸 가정통신물을 들고 막연해 하다 자녀가 자리를 뜬 사이 선생님에게 전화를 걸어 아이가 가정통신물을 가져오다 잃어버렸다고 하는데 내용이 무어냐고 묻는 젊은 엄마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이다.
친구가 「살구어머니회」라는 지역사회 복지를 위한 모임을 운영하고 있다. 그 모임에서 「영어기초반」「일어기초반」「한문기초반」강좌를 열면서 맞벌이 부부의 저학년 어린이를 위해 「한글반」강좌도 열렸는데 어느 강좌보다 「한글반」강좌가 인기라는 것이다. 안내문이 나가자 모여든 수강생은 저학년 어린이가 아니라 30대에서 40대의 엄마와 60대의 할머니까지 다양한 층의 어른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욱 눈물겨운 것은 초급반 2개월을 수료한 65세의 할머니가 20대 초반의 선생 손목을 잡고 눈을 뜨게 해주었으니 평생 은인이라며 중급반 고급반까지 신설해 달라고 눈물로 호소하더라는 것이다.
문맹이 의미 우리 곁을 떠난 줄 알고 살아온 내 무지가 문맹인 것 같다. 내 자녀에게 피아노나 미술 등의 과외공부를 시키느라 은행창구 앞에서 부끄러움으로 몸을 움츠리고 서있는 이웃이나 가정통신물을 손에 들고도 학교로 다시 다이얼을 돌리는 젊은 이웃의 답답함이 있음을 알지 못하고 내가 있음이 부끄럽다.
나는 왜 나의 작은 공간과 쪼갠 내시간으로 이웃의 답답함을 풀어줄 용기를 가지지 못했었나. 용기랄 것도 없지만, 요즘세상에서는 자기의 공간과 시간을 조건 없이 아주 조금 내놓는 것도 용기일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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