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마지막 토요일, 「청소년 발언대」라는 모임에 간적이 있다. 중학생에서부터 고교생, 근로청소년까지 10대들이 그들의 생각을 건강하게 펼쳐보이는 자리였다. 발언내용중에는 눈시울이 뜨거운 감동도 있었고 우리 사회의 밝은 미래가 또한 거기 있었다.
잠시 흐뭇하던 귀가길이 웬지 우울해졌다. 피하고 싶은 고단한 삶을 견뎌내는 모습들, 지친 방황과 외로운, 「부모들이 우리를 사랑하도록 힘쓰자」는 제법 어른스런 원망과 꾸짖음들이 내 귓속을 울렸다. 그 자리에 점잖빼며 앉아있던 나자신이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작년 4월의 기억이 되살아 났다. 계절병인듯 며칠을 삐쭉거리던 아이가 어느날 느닷없이 목놓아 우는게 아닌가. 『난 가출하고 싶었지만 돈이 없어서 못나갔어』아니, 그건 문제아들이 하는 소리가 아니냐. 『죽고 싶어』순간 끔찍한 청소년 자살보도가 머리에 떠올랐다.
『내인생에서 대학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도무지 알수 없어』그래, 공부가 하기 싫은게지 쯧쯧. 『엄마 아빠 인생을 나한테 강요하지 말아 주세요』이쁨에선 말문이 막혀 버렸다. 제법 모범적인 민주가정의 부모라고 자부하던 나를 아이는 당혹하게 만들었고 우리의 그날 대화는 두터운 벽만 쌓은채 끝나 버렸다.
우리가 17년간 주고 받은 사랑이 그날 딸아이에게선 흔적조차 없었고 대신 엷은 배신감이 우리를 가로 막았다.
1년 앞당겨 찾아온 고3병을 앓던 아이앞에 나는 속수무책이었다. 내가 할일은 고작「이 정도도 견뎌내지 못하는 나약한 아이로 길렀던가」하는 자신에 대한 자책과 실망뿐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나는 초조해 졌고 반발하고 도전하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풀겠다는 아이의 고집이 야속하고 밉기까지 했다.
안절부절못하는 아이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서서히 깊은 강속으로 빠져드는 듯한 두려움을 느끼던 그즈음 누군가 내게 얘기했다. 『당신이 베풀었다고 믿는 그사랑이 과연 그 아이가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사랑이었을까요』
순간 갖가지 의문들이 머리를 때렸다. 우리들 부모들의 사랑은 기껏 사막의 태양처럼 주책없이 뜨겁기만한 눈면 사랑이 아니었을까. 그러면서 정작 부모들은 아이들을 버려둔채 숲속에서 길을 잃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거울앞에선 부모들은 자신과 똑같은 모습의 아이들이 거울앞에 나타나 주기를 바라는게 아닌가. 아이가 자라면서 안겨주던 그 수많은 기쁨들을 아이에게 남김없이 되돌려 주는 방법을 아는 부모는 얼마나 될까. 어느새「어른」의 허위의식에 깊이 젖어있는 나를 발견했다. 나는 생각했다. 편견과 아집의 껍질에서 벗어나야 한다. 어른이라는 기독권으로 단단히 무장한 오만의 두께를 벗겨내야 하리라.
불꺼진 방에 살며시 들어서서 살짝 이불을 들쳤을때 딸아이는 숨죽여 울고 있었다. 아직도 울게 하다니…. 눈물·콧물이 범벅된 얼굴을 이불로 문질러대는 모습을 보며 나는 내힘이 닿지 못하는 부모로서의 내한계를 뼈저리게 느꼈다.
『엄마를 위해 기도해 줄래? 실은 엄마가 너보다 더 힘들고 어렵거든』나는 아이를 통해 겸손한 어른이 되고 싶었다. 아이는 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고 내 독선의 가시에 찔렸던 상처를 아이가 어떻게 위로받을 수 있었는지 나는 알수가 없다.
며칠뒤 부엌에 있는 내 등뒤에서 아이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 큰일났어. 오늘 고해성사를 봤는데 신부님이 날 알아봤어. 아이 창피해』아직도 내 「부모됨」은 먼길을 남겨 놓고 있었고 내 부족함은 어느새 하늘까지 닿아 있음을 그때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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