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5일은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사제 순교자 대축일이다.
주지하는 것처럼 김대건 신부는 우리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사제가 되신 분이며 103위 한국순교성인들 중에서는 제일 앞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첫 사제이면서 우리의 순교성인들 중 첫자리에 자리잡고 있는 김대건 신부는 사제로서뿐 아니라 한사람의 신앙인으로서도 우리 모두의 귀감이 되고 있음은 재론이 필요없다.
그가 15세의 어린 나이에 1836년 고국을 떠나 머나먼 이국땅 마카오와 필리핀、중국등지에서 사제수업을 하며 겪어야했던 수많은 고초와 몰래 조국을 드나들며 당해야했던 위험한 순간들은 이루다 형언하기 어렵다.
10년의 천신만고끝에 1845년 8월 상해의 김가항성당에서 사제품을 받고 귀국해 사목활동을 시작했으나 선교자들의 새 입국통로개척에 나섰다가 체포돼 결국 이듬해 9월 새남터에서 순교하고 말았다.
그토록 오랜 준비와 각고를 치루고 사제가 된지 불과 1년밖에 안돼 순교한 사실은 어떻게보면 한국교회의 크나큰 손실이요 너무나 아깝고 원통한 일이 아닐수 없다 그처럼 신앙심이 깊고 박식하며 교회와 하느님을 위하는 일에 자신을 송두리째 바칠수 있는 사제이기에 그의 짧은 사제생활은 지금도 많은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자아내고 있다.
그가 그렇게 빨리 순교하지 않고 더 오래 사목활동을 했더라면 한국교회에는 더많은 유익이 있지 않았을까하는 상상도 해보게된다.
김대건 신부가 일찍 순교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는 주교에 대한 순명때문이었다. 그당시 천주교에 대한 감시와 박해는 철저했다. 붙잡히기만하면 배교해서 연명하든가 아니면 죽음을 택해야하는 두 길밖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처럼 절박한 상황에서 선교사 입국통로를 새로 개척하라는 주교의 명령은 사실 김신부를 죽음의 위험속으로 내보낸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명령을 받았을때 김신부의 심정은 어떠했겠는가? 김신부인들 그 명령이 잘못되면 목숨을 바쳐야하는 중대사임을 왜 알지 못했겠는가? 단순히 인간적으로만 판단한다면 그 명령을 따르고 싶지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주교의 명령에 순종했고 그 순종으로 말미암아 결국 체포되고 순교하기에 이른 것이다. 바로 예수께서 죽기까지 성부의 뜻에 순종하신 그 모범을 따른 것이다.
김신부의 이러한 순명정신은 모든세대의 사제들에게 좋은 모범이 될 것이다. 인간적으로 순명하기가 힘든 인사발령에도 아무런 불만의 표시없이 순명하는 분들의 모습은 바로 김신부의 모습을 반영해주며 주교를 중심으로 그리스도안에 일치를 이루고 있는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오늘 성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 대축일을 지내면서 그분의 목숨을 건 순명자세와 전교의 열의를 되새겨 보며 모두가 그분의 모습을 본받기로 다짐해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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