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성심 시녀회 최 데레시아 수녀가 프랑스 유학을 마치고 귀국길에 1991년 여름 아프리카 중부내륙에 있는 루안다와 부르키나-파소 두 나라를 다녀온 최 수녀는 아프리카 2개국을 각각 20일씩 40일간 보고 느낀 바를 최근 본사에 보내왔다. 이 글을 3회로 나눠 싣는다.
아프리카 여행은 내게 꿈이었는데 1991년 여름에 하느님께서는 루안다와 부르키나-파소 두 나라를 다녀올 수 있는 은혜를 허락해 주셨다. 루안다는 아프리카 중부 내륙에 위치한 면적 26.388km(한반도의 1/10)의 아주 작은 나라였고 연평균 기후가 23℃의 열대성 기후였다. 내가 있었던 「붕구에」는 해발 2,500m 산 위였기 때문에 아침, 저녁은 5℃까지 내려갔고 낮에만 더웠다. 이 나라의 작은 땅에도 인구는 7백18만 명이나 살았고 가톨릭 50%, 개신교 10%, 회교 1% 그 외는 토착신앙인들이다. 땅은 좁고 인구는 많아 생산되는 것은 산을 모두 개간해서 얻을 수 있는 곡식류와 사탕수수, 바나나, 차(茶)이다.
내가 가기 전 6월에 폭우로 인해 강남콩 농사를 거두지 못한데다가 더욱이 우간다와의 전쟁 때문에 국민들은 굶주림과 병고로 극도의 가난에 더욱 시달리고 있었다. 보통 하루에 두 끼를 먹었는데 하루에 한 끼, 심지어 3일에 한끼를 먹으며 목숨을 이어가는 실정이었다. 그들이 걸친 옷은 옷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누추했고 물과 비누가 없어 형편없이 더러웠다. 신발을 신은 사람은 그 나라 도시에서나 찾아볼 수 있고 모두가 맨발이다.
어떻게 이토록 가난하고 비참할 수 있을까? 지구 한 구석에 버려진 것 같은 사람들, 하느님이 사랑이신데 어떻게 이대로 두시는가… 사실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을 그들의 비참한 모습을 보면서 실제로 나는 몸살을 앓았고 1주일이나 가슴이 아팠다. 적십자사에서 배급을 주는 날이었다. 우리나라 명동거리와 같이 선교사 수녀님들의 학교와 진료소 또 성당 마당까지 빽빽하게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주위의 마을에는 군데군데 몇 가구 살지 않았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어디서 모였느냐고 물으니 최소한 한 시간에서 두 시간 이상 걸어온 사람들이란다.
배급을 타는데 이 많은 사람들이 다 배급을 받아야 할 대상이지만 그 중에서 일부 밖에만 줄 수 없는 데 혹시나 해서 이렇게 다들 모여들었다는 것이다. 다들 배고픈 사람들이라. 나도 좀 먹어보게 달라고 덤비면 어쩌나 했는데 그들은 양순하게 기다렸고 자기보다 더 못한 어려운 처지의 사람부터 주는 대로 받아갔다. 배급을 받는 주머니마다 구멍이 나 있어서 그나마 받은 옥수수나 콩이 다 새지를 않나하면 설탕과 죽같이 생긴 기름을 비닐 주머니나 혹은 그릇에 받아갔는데 역사 비닐봉지가 아닌 족각에 싸서 받으니 구멍으로 새는 곳을 또 묶어 매는 것이었다. 우리는 시장에서 물건 하나만 사도 쉽게 넣어 주는 주머니가 이곳에는 다 떨어진 것도 귀하고 아예 없다. 학생들은 종이와 연필이 없어 땅에 글씨를 쓰는가 하면 천조각도 얼마나 귀한지 기저귀를 찬 아이가 없다. 혹시 미사중에 아기가 용변을 보면 다 떨어진 손수건 조각만한 천으로 흠쳐서 밖에 버리고 그것을 또 사용한다. 여자들의 옷은 한 폭으로 된 천 두마 정도를 잘라서 바느질도 않고 그대로 허리에 두르면 그것이 여자의 옷 전부다. 빨래 할 때는 빨래한 후 젖은 것을 그대로 입고 다니면 마른다.
이곳의 여자들은 결혼할 때 비로소 결혼선물로 아버지가 팬티를 사주어 처음으로 입어본다. 그러니 선교사들의 활동으로 유럽에서 가져온 온갖 종류의 헌 옷들을 받아 근사하게 차려 입으면 그 옷이 떨어질 때까지 입으며 갈아입는다는 것은 부자들의 생각이다. 밤에는 기온이 내려가 나는 담요 두 장을 덥고도 추워서 잠을 깼다. 그러나 그들은 다 떨어진 옷만 입고 땅바닥에, 아니면 밀대짚 위에 이불도 없이 잠을 잔다. 그들과 더불어 지내는 동안 그 비참함 속에서도 그들은 결코 우리보다 불행하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배가 고프면서도 자신들이 먹기에도 부족한 음식일지라도 식사 때 누가 오면 으례이 나누어 먹을 줄을 알았다. 나는 선교사 5명이 살고 있는 수녀원에 있었는데 이들은 하루에 한 수녀가 2백~3백여 명의 환자를 진료해야 하니 종일 바쁘게 일해야 했고 이야기를 못하고 식사만 할 정도였다. 낮에는 덥고 또 많은 환자들과 지냈기 때문에 샤워를 반드시 해야 했는데 내가 처음 갔을 때 한 간호수녀는 오늘은 괜찮다면서 샤워를 하지 않았다. 알고보니 내가 물을 많이 쓴 때문이었다. 내 딴에는 물을 아껴 쓴다고 비누칠도 못했는데 물이 떨어진 것이다.
다음부터는 맨 나중에 샤워를 했는데 내가 쓰고 남도록 수녀들은 물을 아껴 쓰고 내게 나누어 주었고 식사 역시 그들의 몫을 나누는 것이었다.
그렇다. 나누는 것은 여분의 것을 주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 중에서 자신에게 필요해도 나누는 것임을 아프리카 사람들과 선교사들을 통해 체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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